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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문의 영화이야기- 비밀에 대하여...


비밀에 대하여......최강문 (요술피리 대표작가)


 비밀은 음습하다. 곰팡내가 풀풀 나거나, 예리하게 벼려진 면도날과도 같아서, 쉽게 만지작거릴 수 없다. 하지만 비밀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혼자만의 일기장, 그 속에 자신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표식 같아서 더욱 은밀하다.
음습하면서도 오묘한 비밀은 세인의 세 치 혀끝에서 항상 서성이고 주춤거리기 마련이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의해 언젠가는 드러나고 마는 비밀의 운명은 이미 하나의 이야깃거리다. 그러니까 요즘 글 쓰는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토리텔링’을 이루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니까, 당연히 비밀을 둘러싼 갈등이 있다. 비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물론 음습하면서도 날카롭다. 그런 까닭에 신비감까지 감돌게 된다. 비밀을 간직한 채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지만, 목적을 이루기는 결코 쉽지 않다. 비밀을 지키기는 일은, 비밀에 탐닉하는 이들로 인해 항상 곤경에 처한다. 비밀을 좇아 비밀을 까발리는 이들. 때론 역이용도 서슴지 않는다. 따라서 비밀은 더욱 음습해져서 괴질처럼 번지거나, 더욱 날카로워져서 착한 사마리아인들을 다치게 하기도 한다. 모처럼의 <프리즘 영화 이야기>, 오늘은 비밀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국민당 부총재 왕징웨이는 비밀리에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설립한다. 왕징웨이는 각 피점령지구에 반공산당 사령부를 설립해 항일분자를 박해하고, 중국 항전은 내우외환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때 일본군 세력 범위 안에 숨어든 항일단원들은 일본군을 공격하는 한편, 매국노 왕씨 정부를 죽음으로 응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바람의 소리 저격  자막이 흐른 뒤 영화는 1942년 중국 중경의 번화가를 비춘다. 중국 전통 축제행렬을 뒤따르는 사람들, 잇달아 터지는 폭죽…. 쑨먼이 주도한 중국 임시정부의 20주년 기념행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와중에 한 고급식당에서는 비밀스럽고도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회동이 열리고 있다. ‘장제스를 버리고 우리쪽으로 돌아서라’며 한 노인을 회유하는 양복 입은 신사. 왕징웨이 정부의 보안국 특무처 처장이다. 노인은 말이 없고, 흰 옷의 여종업원, 중경의 대표적 음식인 닭찜을 식탁에 올린다. 그 순간, 흰 옥 여성은 닭찜 밑에 숨겨둔 권총으로 특무처장을 쏘고, 황급히 도주하지만, 삼엄한 경비를 뚫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일본 괴뢰정권의 하수인들이 테러 피습을 당했다는 신문기사들이 스크린에 오버랩되고, 뒤따라 일본 헌병지부의 고문실 장면이 나타난다. 피투성이가 된 채 잔뜩 겁을 먹은 여성, 앞서의 식당 종업원이다. 일본군 헌병 장교는 여성의 흰 옷에 무언가를 바르며 말한다.
“냄새 죽이지? 이건 향료 같은 건데, 특별히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거야. 우리 팔순이가 제일 좋아하지.”
바로 옆에서 코넌 도일의 <바스커빌 가문의 개>에 나옴직한 덩치의 개가 으르렁거린다. 팔순이다.
“빨리 말해, 시간 끌지 말고. 너네들 정보, 다 어디서 나온 거야?”
대답이 없자, 헌병 장교, 아예 향료를 그릇째 부어버린다. 이어 개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교차되는 여성의 비명.
다음 장면은 헌병 장교를 따라 고문실을 들어서는 검정옷의 중국인 남성. 왼쪽에 검정색 가방을 껴안고 있다. 복도에서 마주친 젊은 일본군 장교-이 영화의 중심축에 있는 인물이다-에게 비굴해보일 정도로 인사를 한다. 앞서던 헌병 장교 왈.

“그 여자 정말,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 봤는데 입도 뻥끗 안 해.”
“그럼 이제 아저씨밖에 없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몇 장면 뒤 중국인, 웃음을 띠며 헌병대 건물을 나선다. 일본군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일본군 또한 ‘하이!’ 하며 잘 배웅해준다. 건물 안에는 머리 곳곳에 침을 맞아 숨이 끊어진 흰옷 여성이 쓰러져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바람의 소리, 만찬 ‘비밀조직의 보스 권총의 지시를 받는 유령이 길거리 벽보를 통해 암살 지령을 내린다…’
흰옷 여성으로부터 단서를 찾은 일본군, 비밀조직의 첩자가 반공산당사령부 내부에 잠입해있음을 알아차린다. 흰옷 여성의 집에서 비밀조직의 암호해독문까지 입수한 일본군, 내부 첩자를 색출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리고, 이 비밀을 취급하게 된 5명의 사령부 요원을 외딴 곳에 격리수용한다. 첩자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암호해독부장 리닝위, 암호전달원 구샤오멍, 반공산당 대대장 우쯔궈, 군기처 처장 진썽훠, 사령대총관 바이샤오넨, 비밀 암호로 도착한 정보를 해독하고, 비밀 정보를 전달하거나 옆에서 지켜본 사람 다섯 명은 독 안에 갇힌 쥐 신세가 된다.

 다섯 명의 용의자는 비밀만큼이나 음습한 외딴 별장에서 면도날보다 더 날카로운 심문을 받는다. 회유를 받기도 하고, 고문도 당하지만, 비밀은 잘 드러나지 않는 법. 서로간의 팽팽한 긴장은 닷새 나절동안 진폭을 더해나가며 서로의 생사를 가로지른다.

바람의소리, 포스터

바람의소리, 리빙빙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바람의 소리>다. 중국 작가 마이찌아의 소설을 중국의 신예 영화감독 가오췬수와 대만 출신의 첸쿠오푸 감독이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배우들도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 함께 참여했다고 하니, 중국과 대만의 합작품인 셈이다.
첩보영화와 심리스릴러물이 결합된 영화 <바람의 소리>에서 비밀은 무척이나 중요한 모티브를 갖는다. 조직 활동의 수단이자 목적이기도 한 비밀은 모르스 부호나 암호문으로 첫 모습을 드러낸다. 비밀 자체의 신비함은 해독 과정에서 관련 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표정으로 더욱 증폭되거나, 증오 또는 멸시의 감정으로 급강하한다.

바람의소리, 취조  비밀을 지키려는 자의 노력 또한 롤러코스터를 탄 듯, 생과 사의 갈림을 수시로 넘나든다. 비밀을 캐내려는 자들의 집요하고도 집요한 공격.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협박과 강요 수준을 넘어서는 서슴지 않는 최고도의 압박. 고문.
영화에서 등장하는 검정옷 중국인의 검정가방에는 고문도구가 들어있다. 1980년대 민청련 김근태 고문사건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얼핏 떠올리게 하는 중국인의 고문도구는 그러나 각종각양의 침. 전기고문, 채찍질에 가랑이 사이로 줄을 타게 하는 성고문 따위의 일본식 고문과는 차원이 다른 중국식이다. 비밀을 간직한 이는, 아니 비밀은 일본식 고문이든, 중국식 고문이든, 그보다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대의를 위한 비밀은 믿음이자, 신념이고,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밀은 음습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으며, 고문에 맞설 힘을 갖게 되며, 삶과 죽음의 경계을 넘어선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세 번 등장하는 경극 <당산그림자놀이> 속의 노래 ‘공성계’에서도 비밀은 이중의 의미로 숨어있다.
‘나는 본래 와룡강에 소박하게 살던 사람이나 천지의 헤아림이 음양을 헤아리듯 손쉬웠다네…’
그렇다. 소박한 이들에게 비밀은 천지의 헤아림이자, 음양의 이치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 침략에 맞선 이들에게 소박한 노래 한 곡조, 한 소절까지도 암호화된 알고리즘으로 등장한다. 바로 한 컷 한 컷의 필름까지도 놓침이 없이 치밀하게 짜여진 <바람의 소리>의 매력이다.

 지난 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바람의 소리>를 보았다. 수영만요트경기장 옆 야외상영관, 가로 24.9미터, 세로 13.5미터 규모의 대형스크린도 대단했고, 그 너머로 비치는 달빛, 갈매기 울음소리와 바닷내음도 멋졌다. 그러나 정작 나를 전율케 한 것은 영화 <바람의 소리>였다. 잘 짜여진 구성, 절제된 연기와 수준 높은 카메라 작업, 팽팽한 심리 갈등을 그대로 옮겨주는 음악, 특히 콘트라베이스와 첼로의 울림….
그날 이후 가까운 이들에게 선전했다. ‘<바람의 소리>, 정말 대단한 작품이니 꼭 보도록 하라’고. 그러나 영화는 7개월이 지나도록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개봉되어 큰 인기를 누렸는데…. 무슨 이유일까? 그뿐이 아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인정받는 영화제로 자리 잡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정부의 예산 지원이 대폭 줄었다고 한다. 왜일까? 무슨 음습하면서도 날카로운 비밀이 숨어 있는 것 아닐까?
뭐, 그다지 대단한 비밀도 아닐 터이다. 이 땅에서 소박하게 사는 사람 모두는 그 비밀을 손바닥 안을 헤아리듯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성계’ 노래가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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