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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소통

정책제언


장애인 당사자의 공직참여,경험과 교훈(3) 안규환(제주도농아복지관 관장,전 보건복지부 재활지원과장)

제 2 부 임용과 업무수행


1. 계약


나는 두 번에 걸친 면접시험을 치뤘다. 그 첫 번째는 인사위원회였고 두 번째는 장관 면접시험이었다. 사실 장관 면접시험은 의외였다. 직무수행계획서에 대한 1차 면접시험과 최종 후보자 2인을 상대로 한 장관 면접시험은 그 내용이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명확한 준비기준이나 답변요령 등을 경험할 기회가 없이 처음 임하는 경우라서 상당히 당황했다. 답변이 장황해지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답변했던 것 같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CBR 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엉뚱한 답변을 했던 것 같다.나는 2004년 4월 26일 임용되었다. 계약기간은 2년이었다. 재활지원과(팀)장으로서 업무파악을 위해 3일전부터 출근해서 당시 근무하던 사무관, 직원들로부터 업무보고자료를 제출받고 읽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연봉과 관련된 계약은 명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첫월급은 5월에 받았다. 내가 받는 연봉 총액이 얼마이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2. 업무분장

나의 직무(업무분장)는 두 번에 걸친 큰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 변화는 장애인체육 및 장애인단체 관리가 장애인정책과로 이관되고 장애인생활시설과 장애수당, 의료비지원, 각종 할인?감면 제도 운영 등의 업무가 우리과로 이관되었다. 두 번째 변화는 장애수당, 의료비지원 등의 업무가 소득보장팀으로 이관되고 자립생활지원업무가 우리팀에 신설되었다.
재활지원팀의 소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정된 인사원칙이 있어야 했으나 세 번에 걸쳐 인사이동이 있었다. 2년의 계약기간동안 한명의 사무관만이 함께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총괄보다 사무관, 직원들의 세부업무까지 직접 챙길 수 밖에 없었다.
장애인체육관리와 관련해서는 아테네장애인올림픽과 멜버른농아올림픽 성공적 운영과 문광부와의 ‘장애인체육’ 이관문제가 핵심이슈이었다. 또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의 임원개편도 초미의 부처간의 관심사였다. 부회장 중심 체제를 회장중심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 문제였다. 장애계의 다양한 의견과 역할 갈등이 겹쳐서 쉽게 진행될 수 없는 이슈들이었다.
지금와서 판단해보면 내 의지가 반영되기 보다는 환경과 역학구조가 정책을 결정했고 결국 재활지원팀장의 역할은 야구 패전처리용 투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의지가 맞았다고 생각한다. 원칙을 통해 결정했어야 할 문제였다고 보며 국제조류와 비교했을 때 미래의 한국 장애인체육은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 예상된다.
장애수당과 관련해서 장애로 인한 추가비용 산출이 조사마다 틀려 의사결정에 큰 지장을 초래했던 기억이 있다. 장애인과 관련된 생활통계가 시계열로 축적되어 있지 않고 있어 매번 표본조사마다 결과가 달라 데이터에 근거를 둔 정책을 결정하기 보다는 예산, 관리편의 등에 중심을 두어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실제 장애인들의 정책 체감도가 상당히 낮았다.
특히 KTX 할인제도 변경과 관련해서 그 영향은 너무 컸다. 장애인이면 누구나 50%의 할인을 받을 수 있었던 제도를 장애급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할인율을 적용하는 제도로 변경할 때 부처 간에 상당한 시간을 두고 서로 각자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하는 지루한 조정기간이 있었다. 장애인 탑승 데이터가 있었다면 그리고 전반적인 장애인 생활통계가 있었다면 쉽게 결론이 날 수 있었던 사안이었다. 나는 이 사안과 관련된 조사예산을 확보할 수 없어 장애인정책과가 수행하던 LPG사용현황 조사 시 KTX탑승현황도 함께 조사했던 과거가 있다. 그러나 그 조사결과가 정책결정에 반영되지는 못했던 아쉬움이 있다.
뒤 늦게 내 업무가 되었던 자립생활지원업무와 관련해서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없었던 학습의 연속이었다. 시범사업과 연구사업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전문가와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정책구상을 했다. 그리고 이미 다른 부서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기 시행중인 유사사업의 실적과 평가 내용도 조사하면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하나 더 이야기하면 “재활보조기구” 관리업무는 시작도 못하고 임기를 마쳤다.
다만 재활지원팀장을 역임하면서 “재활의료”의 특수성과 발전성을 발견했고 “실시간모니터링”, “복지행정의 IPTV도입방안” 등을 착안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큰 밑천이 되고 있다.
개방형 직위 공모 시 나에게 부과된 업무와는 다른 일을 하고 임기를 마쳤다. 앞으로 개방형 직위에 도전하려는 많은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업무분장은 바뀔 수 있음을 알고 항상 유연한 자세로 학습능력과 사전 정보 축적, 인적 네트워크 능력을 키웠으면 한다.


3. 성과평가

나는 두 번 성과평가를 받았다. 첫해는 시범사업이었던 같고 2005년 성과는 "A"등급을 받았다. S,A,B,C 등급중에 A등급을 받았던 것이다. 현안을 해결하면서 평가보고서도 써내고 사무관들의 업무실적이 나의 평가에 바로 반영되는 구조속에서 나만의 고유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과제(업무)를 만드는 것은 제한된 시간속에서 어려웠다. 이미 전임자들이 벌려 놓은 일들을 마무리 짓고 민원과 신문에 기사화되는 사안들을 일일이 1페이지로 정리해서 장관실까지 보고해야 하는 일상은 아침 6시30분에 과천청사에 도착하고 저녁 9시 이후에 퇴근하더라도, 그리고 자주 야근을 해도 끝이 없는 상황이었다.
개방형직위로 임용된 나는 서로 다른 틀의 계약서를 두 번 이상 쓴 것 같다. 각각의 규정에 맞춘 성과보고서를 작성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면에서 성과가 날 수 있는 일만 하게되는 유혹도 있었다.


4. 교육

나는 2004년 8월에 뉴욕에 갔다. “장애인인권조약”관련 회의였다. 정부대표였다. 처음 외국에 나가게 된 계기였다. 물론 국내 현안 때문에 회의를 끝내고 귀국하지는 못했다. 나는 영어를 읽고 해석할 줄은 알지만 듣고 말하고 쓰는 것은 취약했다. 10일간 UN 국제회의장에서 영어와 기타 다른 언어들 속에서 나의 한계와 도전의 지향점을 발견했다. 일본 장애인들도 만났다. 외교통상부 UN대표부 공사는 나에게 마음에 남는 인상을 심어 주셨다. 그때 함께 갔던 민군식 이사장님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침마다 걸었던 뉴욕의 거리는 지금 가물가물하지만 공무원으로서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되었다.
2005년 12월인가 기억은 잘 안나지만 보건복지부 팀장 교육이 있었다. 남이섬, 정동진 배호텔, 신촌 등에 직접 가서 남이섬과 정동진 배호텔 등을 직접 경영하시는 사장들로부터 리더쉽을 보고 들었다. 결국 행정과 경영이 수렴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행정과 경영이 교류되어야만 제한된 자원 즉 희소성의 원칙을 극복할 수 있는 정책대안이 마련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5. 소결

나는 계약, 업무분장, 성과평가, 교육 등의 주제를 통해 다음과 같은 프레임을 갖게 되었다.

정치,정책,행정,교육,현장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결국 행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치, 정책, 교육, 현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귀중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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