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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라리아를 찾아서


할렐루야, 브로큰 할렐루야!이범재 ([사]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1.

 몇 년에 한 번씩 연락을 나누던 그녀에게서 메일이 왔다.

 ‘Hyung, 지난 여름에 대학에 들어간 내 큰 딸아이를 한국에 보내요. 20년 전, 제가 했던 여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20여 년 전에 그녀는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한국에 왔다. 작지만 예쁘고 침착했던 그녀를 지금의 정동극장 근처에 있는 미국 감리교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짜고짜 꺼내서는 우리의 인천 조그마한 아파트로 옮겼다.

 80년 중반, 우리는 모두 혁명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학을 끝낸 우리들은 각자의 인연을 찾아서 인천으로, 울산으로 흩어졌다. 어떤 이는 비교적 손쉽게 조그마한 공장에 들어가기도 했고, 어떤 이는 별 성과도 없이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혁명적 열정에 값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는 현실적 위협들과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이성적 목표 못지않게 20대의 들끓는 젊음의 욕망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시의 시대적 열정은 한국이라는 영토에 갇혀 있지 않았다. 미국에 살고 있던 한국계-미국인들에게도 80년 광주의 충격은 삶의 지향을 바꿔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미국 감리교회가 청년신도들을 위해 마련한 해외 인턴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왔다. 처음 엘살바도르에 가려했던 그녀의 계획은 운명처럼 바뀌었고 그래서 우리는 시대적 열정과 젊음의 욕망이 격렬하게 휘돌던 20대 후반의 몇 년을 이곳에서 같이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별다른 대단한 일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말을 배우고, 몇 권의 좋은 영어책과 자료들을 번역하고, 한국의 상황을 세계의 인권네트워크에 알리는 뉴스레터를 만들고, 그리고 그보다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얘기하고 술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녀는 당시의 학생운동 주류들과 연결되어 전대협의 방북 후보로 준비를 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 역할은 임수경씨가 맡아서 훌륭하게 해 내기도 했다. 그렇게 2-3년을 보낸 그녀는 다시 미국에 돌아가 피코노동자들의 방북 투쟁을 돕기도 했고, 90년 초 뉴욕에 자리잡은 황석영 선생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직업을 갖고 아이를 낳아서 생활인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흐른 20여년의 세월을 지나 어느덧 50 문턱에서 우리는 지난 세월들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꿈과 혁명적 열정과 들끓는 욕망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꿈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 처절하게 외면 받았다. 아니,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예외도 없이 우리는 나이가 들었고 세상은 달라졌으며 지금 이 순간에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지금의 문제들을 갖고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아마도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딸아이의 방문을 ‘자신의 여정을 이어간다’고 표현했으리라. 그녀와 내가 가졌던 꿈과 도전과 여정은 다음 세대의 그것들과 어느 만큼이나 다른 것일까?

2.

 그녀의 딸은 엄마만큼이나 예쁘고 어른스러웠다. 또래의 내 조카들과 비교해도 훨 침착하고 대담했다. 딸아이의 일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엄마의 옛 흔적을 찾아서 일본과 한국의 인연들을 대신 찾아가는 순례의 길과 같았다. 일본에서는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지원운동을 했던 일본 교회의 인권운동가들을 만났고 한국에서는 ‘야생초 편지’를 쓴 황대권선생을 찾아가는 일정도 있었다. 딸아이의 여행은 중국과 몽골에서의 2주간의 봉사활동,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가는 모스크바까지의 여행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갖 20살이 된 여자아이에게는 너무 힘들고 위험해 보이기도 했으나 아이는 침착하고 두려움 없이 그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기 몸보다도 커 보이고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짊어지고 나타난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난감했다. 20여년 전에 우리는 농활을 가고, 공장지대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맑스와 필리핀의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공부를 했었는데, 50이 다된 부모의 친구에게 아이들은 무엇을 기대할까?

 딸아이는 조그마한 유클렐레를 가지고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백인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리드기타 겸 노래를 담당했던 아이는 노래를 좋아하고 잘 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인사동과 화랑들을 쏘 다니다가 명동의 ‘섬’에 노래를 부르러 갔다. 몇 사람이나 앉을까 말까 할 공간에는 예의 익숙한 손님들과 취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몇 곡 했고 역시 80년대의 세례를 받은 섬 주인의 답가도 들었다. 오랜만의 젊은 음악친구를 만난 주인은 아끼던 하모니카를 선물하기도 했다. 딸아이는 자신의 자작곡들과 유명한 팝송들을 몇 곡 노래했고, 그리고 ‘할렐루야, 브로큰 할렐루야’를 불렀다.

3.

 70-80년대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노래를 좋아했다. 어쩌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장애를 가진 고등학생의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몇 개의 음악방송들을 듣고 낡은 전축에 올려놓을 음반들을 사 모았다. 한 때는 음악방송의 진행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 때 사 모았던 수백 장의 음반들은 몇 번의 수배와 압수수색, 그리고 그보다 수십 회에 달하는 이사로 인해 많이 유실되었지만 아직도 조금은 남아서 옛날을 기억하게 한다.

 그 때의 내 수집 목록에는 당연히 한대수와 김민기 양희은 등이 있었고 밥 딜런과 존 바에즈와 그리고 조니 미첼이나 레오나드 코헨도 포함되어 있었다. 80년까지 발표된 레오나드 코헨의 음반을 몇 개 가지고 있었던 나는 당연히 대부분의 그의 노래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의 ‘할렐루야’라는 노래를 알지 못했다.

 딸아이가 부르는 ‘할렐루야’는 너무나 좋았다. 바로 그 노래의 뜻을 알지는 못했으나 종교적 후렴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노래는 순식간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날 저녁에 인터넷을 통해서야 나는 그 노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레오나드 코헨의 ‘할렐루야’는 내가 소위 운동권으로 살던, 그래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 여유도 갖지 못했던 열정의 80년 대 중반에 발표된 것이었다.

 ‘할렐루야’는 레오나드 코헨만이 아니라 아주 많은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려진 명곡이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얼핏 확인한 것만 봐도 슈렉의 O.S.T로 쓰여졌던 루퍼트 웨인라이트, 밥 딜란,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커버라고 부르는 제임스 버클리, 쉐릴 크로, 엘리슨 크로우, 데미안 라이스, K.D 랭, 본 조비 등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할렐루야’는 구약의 다윗왕에 대한 전설과 삼손과 데릴라의 에피소드, 그리고 아마도 이 노래의 화자의 얘기로 꾸며져 있다. 이 노래 가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었지만, 다음에 소개된 블로그의 설명이 가장 근거가 있어 보였다.

이 노래는 전적으로 성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노래에 나오는 데이빗은 성경의 다윗을 가리킨다. 다윗은 그가 왕이 되기 전 사울 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곤 했는데, 이는 사울 왕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노래는 또한 다윗의 입장에서 그의 감정을 표현했다. 다윗은 바데세바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려가면서까지 그녀에게 음악의 위대성과 중요함을 일깨워 주면서 그녀의 관심을 사려 했지만 바데세바는 다윗의 이런 노력을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슬픔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런 다윗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돌아온 것은 무관심과 냉소였다. <중략>

다윗이 왕이 되고 우연한 기회에 이미 다른 사람(유리아)의 여자가 된 바데세바가 지붕위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윗왕은 바데세바의 아름다운 모습을 글로써 표현한다.

바데세바의 아름다움을 떨려버릴 수 없었던 다윗왕은 그녀의 남편 유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고 그녀를 임신시킨다. 하나님의 자손인 다윗의 이런 도덕적, 윤리적 타락과 죄로 인해 다윗왕국은 무너지게 되는데 레오나드 코헨은 이를 마치 삼손이 머리가 잘려서 힘이 소멸되었듯이 다윗왕의 몰락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출처:http://blog.joins.com/media/index.asp?uid=higgink


 나는 성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해서 이런 해석의 문헌적 근거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이 노래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버전의 가사가 사용되고 있었다. 어떤 버전의 가사를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또 가사 자체가 동일한 화자의 관점에서 진행되지 않고, 노래하는 사람-가사속의 여인(바데세바)-다윗왕 등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들이 이 노래의 의미를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해석 가능한 분들을 위해 노래의 가사를 옮겨 본다.

"Hallelujah"

Now I've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That David played, and it pleased the Lord
But you don't really care for music, do you?
It goes like this
The fourth, the fifth
The minor fall, the major lift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ou
She tied you To a kitchen chair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Baby I have been here before
I know this room, I've walked this floor
I used to live alone before I knew you.
I've seen your flag on the marble arch
Love is not a victory march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There was a time you let me know
What's really going on below
But now you never show it to me, do you?
And remember when I moved in you
The holy dove was moving too
And every breath we drew was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You say I took the name in vain
I don't even know the name
But if I did, well really, what's it to you?
There's a blaze of light
In every word
It doesn't matter which you heard
The holy or the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I did my best, it wasn't much
I couldn't feel, so I tried to touch
I've told the truth, I didn't come to fool you
And even though
It all went wrong
I'll stand before the Lord of Song
With nothing on my tongue but Hallelujah

well, maybe there's a god above
but all i've ever learned from love
was how to shoot somebody who outdrew you
it's not a cry that you hear at night
it's not somebody who's seen the light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할렐루야”

나는 다윗이 연주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는
전설의 비밀 화음이 어딘가 전해져온다고 들었어
하지만 당신은 음악 따위엔 그리 관심 없지, 안 그래?
그 코드는 이렇게 짚는다고 해
네번째 다음 다섯번째 음,
단음을 올리고 장음은 내리면서
좌절한 왕은 할렐루야를 작곡했지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당신의 믿음은 굳건했지만 당신은 증거가 필요했고
옥상에서 일광욕을 하는 그녀를 보게 되었어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과 달빛은 당신을 관통해 버렸지
그녀는 당신을 부엌 의자에 묶은 다음
당신의 옥좌를 부수고 당신의 머리칼을 자르고
마침내 당신의 입술에서 할렐루야를 끄집어내 버렸어

내 사랑, 내게 이곳은 초행이 아니야
그때도 이 밤을 보았고 이 마루를 거닐었어
당신을 알기 전까진 홀로 살아왔지만
대리석 아치 위에 꽂힌 당신의 깃발을 보았지
하지만 그대, 사랑은 승전 기념 행진이 아니야
그건 단지 싸늘하고 부서진 할렐루야일 뿐이야

저 아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언젠가 당신이 내게 자상하게 알려줬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지금 당신은 전혀 예전 같지가 않아
하지만 잊지 마. 내가 당신 속으로 들어갔을 때
저 성령의 비둘기도 같이 들어왔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한 그 호흡은 모두 할렐루야였다는 걸

저 위에 정말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사랑을 통해 배운 건 오직 내게서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토로하게 만든 누군가를 죽여 없애는 것
한밤중 당신의 귀에 들려오는 이 소리는
통곡도 오열도 빛을 발견한 사람의 환호도 아니야
이건 그저 싸늘하고 부서진 할렐루야일 뿐이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출처:http://blog.naver.com/surisanj?Redirect=Log&logNo=140051208071


4.

 레오나드 코헨이 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나는 이 노래의 가사말을 여러 번 되새겨 보았다. 영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번역가들에게 재미삼아 문의를 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은 대강의 어떤 의미의 얼개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얼핏 보면 이 노래는 반종교적인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성스러운 다윗왕의 패륜적 행위가 노골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더 나아가 다윗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만들었던 노래-할렐루야가 다윗왕이 사랑했던 여인 바데세바의 몸을 가질 때 그의 입에서 끌어내어 진다. 다윗왕의 승리의 영광을 위해 찬양되었던 할렐루야는 차갑고 부서진 할렐루야로 이해될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그 가사들을 음미해 보면 레오나드 코헨은 성스러운 할렐루야와 속세의 할렐루야를 대비하면서 성스러운 할렐루야를 부정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속세의 차갑고 부서진 할렐루야와 성스러운 할렐루야가 다 같이 하나의 궁극의 것임을 말하는 듯이 보인다.

 조금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절대자에 대한 지고한 찬양의 순간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지독한 사랑의 순간은 등가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졌다. 그 누구의 할렐루야이던, 그것이 치열성을 가진 것이라면 어찌 함부로 폄하할 수 있겠는가? 그 누구의 여정이던 그것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어찌 쉽게 가볍고 무거운 것을 평할 수 있겠는가?

 그녀와 함께 했던 20여 년 전, 우리의 여정이 비록 소중하고 의미 있고 또 절박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녀의 딸아이가 이어가는 여정의 편안함과 가벼움을 타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여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이 여정의 색깔 차이는 사소한 것이며 젊은이들이 겪는 모든 도전의 여정만이 소중한 것일테다.

 그래서 우리 80년대의 저 성스러운 할렐루야는 또한 우리들의 부서지고 차가운 할렐루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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