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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 장애학이야기

미국 장애 운동사


미국 장애 운동사 번역/윤삼호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소장)


이번 호부터는 Doris Zames Fleischer와 Frieda Zames가 함께 지은《The Disability Rights Movement》를 요약 번역하여 연재할 것이다. 편의상, 주석은 모두 생략하였다.

<글 싣는 순서>

제1장 장애와 이미지: “휠체어에 묶인”, “포스터 아이”
제2장 촉감으로 보고 손짓으로 듣고
제3장 탈시설과 자립생활
제4장 장애권 법률의 효시: 재활법 504호
제5장 변화를 향한 투쟁: 길거리에서, 법정에서
제6장 미국장애인법(ADA)
제7장 노동 접근권과 보건
제8장 “NOT DEAD YET”와 의사조력자살
제9장 장애와 기술공학
제10장 상이군인들의 권리 요구
제11장 교육: 최소제약환경으로의 통합
제12장 정체성과 문화



제1장 장애와 이미지: “휠체어에 묶인”, “포스터 아이”

 “불구자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CRIPPLED)”, 이 문구는 1970년 발행된 우표의 이름이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지마비인이자 미국 교육부 차관보 쥬디스 휴맨은 1980년 미국시민권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 우표의 그림을 보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 아이가 일어서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 당신은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이 이처럼 서 있는 자세를 취할 때, 그것이 정상성이다.” 1999년 1월, 미국 국민들은 TV 스크린에서 또 다른 이미지를 보았다. 대통령 수석법률고문 찰스 러프는 빌 클린튼 대통령의 탄핵을 변론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상원 회의장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우리 장애인들의 이미지가 지난 50년 동안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프랭클린 루즈벨트, “치유된 불구자”

 20세기 가장 유명한 정치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에 감염되었지만, 굳이 일어서서 걸어 다닐 필요가 없었다. 국민들은 그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루즈벨트는 장애 때문에 명예가 실추된 사람이 아니라 “치유된 불구자”로 보여 졌고, 그 자신도 그렇게 보았다.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은 이렇게 기술한다.

자신의 몸을 불구자로 만든 소아마비 때문에 그의 정신과 감수성이 고양되었다. 엘리너가 남편의 장애를 “시죄(試罪)”라고 부른 다음부터 그는 덜 오만하고 덜 독선적이고 덜 천박한 대신 더 몰입하고 더 신중하고 더 유쾌한 사람이 된듯했다. 그는 집중력을 더욱 높이고 자기 인식을 더욱 철저하게 하여 시죄를 무사히 마쳤다.


 루즈벨트의 장애가 어느 정도였는지, 사람들마다 말하는 게 천차만별이었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대체로 루주벨트가 자신들의 장애와 비슷하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의 육체적 손상을 애써 외면했다.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아예 몰랐고, 어떤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대통령의 소아마비 감염 사실을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권을 가진 극소수만이, 대통령이 다리 마비 때문에 이동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즈벨트가 휠체어 사용자가 아니었다는 듯이 워싱턴 D.C.의 루즈벨트 기념물을 묘사하기로 한 결정한 것은, 그의 장애를 둘러싼 사람들의 지속적인 자기-기만이 어느 정도였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칼 마이어는 <뉴욕타임즈> “사설”에서 “1997년 봄까지 헌정될 루즈벨트 기념물에서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 없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정반대로, 포토맥 강기슭에 조성될 루즈벨트 동상 세 개 가운데 하나는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마이어의 사설은 루즈벨트에 관한 진실 왜곡을 비판한 것인데도, 독자 편지 두 통을 읽어 보면 루즈벨트의 장애를 끝끝내 사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고집을 엿볼 수 있다.

루즈벨트가 불구자였다는 것은 그를 우리의 위대한 대통령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기념물이라는 것은 이 화강암 동상을 통해 존경을 표시하려는 인물의 특성을 시각적 측면에서 과장하기 마련이다. 그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불구자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는 게 아닐까?

루즈벨트 대통령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장애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념물은 그가 사람들한테 인식되고 기억되는 방식 그대로 그를 묘사해야 한다.


 “기념물위원회 위원인 레스터 하이먼의 말에 따르면, 위원회는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대로 루즈벨트를 보여주기 위해 휠체어나 브레이스를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린 다우드는 루즈벨트의 진짜 모습을 정직하게 묘사해야 한다고 반박하지만, 그녀의 말과 태도는 장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가 루즈벨트를 지칭할 때 사용한 - “휠체어 사용자(wheelchair user)”가 아니라 - “휠체어에 묶인(wheelchair bound)”이란 표현은 멜로드라마 같은 구성이어서 장애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어투는 접근불가능한 사회에서나 들을 수 있는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이런 말은 장애인 개념을 잘못 표현하는 언어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잘 보여 준다.

 다우드는 루즈벨트가 용기 있는 사람이어서 자신의 장애를 은폐했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보다는 장애를 양산하는 경기 침체와 파괴적인 국제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강력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지도자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그렇게 정치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권력과 장애는 상호 배타적이라는 사고가 거의 본능적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잘못된 장애 개념도 문제지만 다우드는 한 술 더 떠 장애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첫째 루즈벨트 같은 “슈퍼병신”에게 감동을 받는다, 둘째 타이니 팀(Tiny Tim)처럼 비장애인들에게 감동을 준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자신이 설립한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의 어느 재활센터에서, 루즈벨트는 그의 아내가 말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뭔지를 보여주었다. 루즈벨트 전기작가 휴 그레고리 갤로퍼의 말처럼, “그곳에는 희롱, 연애, 불륜이 있었고, 이 모든 것들에 관한 잡담이 있었다.” 다른 “소아마비인들” -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청소년들이거나 청년들이었다 - 의 가장 깊은 욕구에 관한 식견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그는 웜스프링스의 “루즈벨트 박사”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이 재활센터는 새로 개발된 치료법으로 마비된 팔다리뿐만 아니라 손상된 자기-이미지도 치유하였다.

루즈벨트는 프레드 보츠를 입원 접수 담당자로 정했다. 중증 소아마비인이자 예전에 그 재활센터에 입원한 적이 있었던 보츠는, 비공식적으로 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도 했다. 루즈벨트의 운영 방침에 공감한 보츠는 윔스프링스 재활센터 “정신의 파수꾼”이 되었다. 루즈벨트가 죽은 뒤에 보츠의 직위도 없어졌는데, 이는 그 재활센터가 환자 제일주의를 버리고 그 대신 전문적인 의료행정가들이 통제하는 시설로 탈바꿈했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대체로 보면 루즈벨트는 장애의 속성을 잘못 제시한 협정(bargain)에 따라 살았다.

롱모어가 말하길, 이 협정은 장애가 도덕규범 위반으로, 즉 노력을 했더라면 그 당사자가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었을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이 같은 장애관을 “의료모형”이라 부른다. 이 모형은 장애 그 자체를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본다. ... “그 협정은 편견이나 차별 같은 것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고 롱모어는 지적한다.


 도리스 컨스 굿윈은《No Ordinary Time》에서 뉴스영화뿐만 아니라 백악관과 사진기자들한테 달라붙어 있는 “암묵적인 의전 규범”를 이렇게 묘사한다.

12년 동안 휠체어를 타고 있는 대통령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인쇄되지 않았다. 뉴스영화가 그가 들려서 자동차를 타거나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연단 뒤에 서 있거나, 보통 의자에 앉아 있거나, 다른 사람의 팔에 기대있었다. 만일, 실제로 가끔 있어났던 일이지만, 기자단 가운데 누군가가 규범을 어겨가면서 대통령의 무기력한 모습을 몰래 찍으려고 하면 고참 사진기자가 “실수로” 그 장면을 가로 막거나 점잖게 카메라를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런 사고는 드문 편이었다. 대개는 루즈벨트의 장애 정도에 대해 “침묵의 장막”을 모든 사람들 - 루즈벨트, 기자들, 그리고 미국인들 - 이 받아들였다.


캐서린 블랙이 자신의 어머니가 소아마비와 싸운 이야기를 적은《In the Shadow of Polio》을 보면, “그 당시 ‘할 수 있다(can-do)’ 같은 온갖 영웅적인 선전 문구들을 비난하는 것이 난감”했다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도덕규범 위반으로서의 장애”를 왜곡된 사회적 시각으로 본 롱모어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어떤 환자들은 회복되지 않은 반면에 몇몇은 극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이유로 회복되지 않은 사람들은 미국인의 건전성 시험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인식되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들은 분명 철제인공호흡기(iron lung)가 아니라 흔들의자, 침대가 아니라 브레이스, 브레이스가 아니라 목발, 목발이 아니라 100야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루즈벨트는 “진짜” 장애인은 아니었다. 대중들에게 먹혀들었던 허상, 그가 많은 사람들 또는 보조기구들 없이도 걸을 수 있었다는 그 허상은 그가 도움 없이도 걸었을 것이다라는 내면화된 속임수가 되었다. 보행에 덧씌워진 상징의 진가는, 그것이 부적절한 것일지라도, 도어 섀리의 영화《Sunrise at Campobello》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루즈벨트가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정치가로 복귀하는 영웅적인 엔딩 장면에서, 그는 1924년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앨 스미스를 지명하기 위해 목발을 짚고 걸어서 연단으로 걸어간다.

 보행 이미지는 단순히 섀리의 은유가 아니다.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 “아침에 네 다리로 걷고, 오후에는 두 다리로 걷고,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 에서 보듯이 그것은 집단적 상징이다. 정답은 사람인데, 이 수수께끼는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유아기 때 두 팔과 두 다리로 기어서 다니고, 늙으면 마치 다리가 세 개인 것처럼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다니는데 이것은 의존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이 가장 힘이 넘칠 때는 스스로 두 다리로 걷는다. 그런데 은유와 실재가 혼동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루즈벨트처럼 “화려한 속임수”를 불가능하게 하는 TV가 등장했지만, 장애 낙인이 너무 깊고 넓어서 루즈벨트만큼 심한 손상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신체장애인연맹

 루즈벨트, 언론, 그리고 대중들은 대통령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신체장애인연맹은 장애 차별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최초로 정치적 지향을 분명하게 밝힌 장애인 단체들 가운데 하나였던 연맹은 정부와 민간기업의 고용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1930년대 설립된 전투적인 단체였다. 1935년 사회보장법은 장애인 소득 지원 및 직업 재활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기회만 주어지면 노동력 경쟁력을 갖출 가능성이 있는 예비 노동자들의 욕구를 충분하게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연맹을 설립한 핵심 인물들은 1935년 5월29일부터 6월6일까지 긴급구호국(ERB) 뉴욕시 지국장 오스왈드 크노스의 사무실 점거 농성에 참여한 장애인 여섯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체적 장애가 고용 기피의 구실로 악용된다고 확신했다. 달리 말하면, 자신들은 신체적 손상 때문에 희생양이 되는 “의료모형”이 아니라 법률로 보호받지 못하는 소수자라고 생각했다.

 회원들은 대부분 이동성 손상자들이었지만, 신체장애인연맹은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회원들 가운데는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을 비롯하여 소아마비인, 뇌성마비인, 심장질환자, 결핵환자 등 다양한 장애인들이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소아마비 대유행기였던 1916년에 감염된 플로렌스 해스켈은 아무리 “완벽한 자격”을 갖추었더라도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비서직에서 일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 “정치화되고 급진화되었다.”

 해스켈은 자신의 장애가 비서 일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데도 신체검사가 불공정하게 고용 기회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장애는 5학년 때 우연하게 발견되었을 정도로 가벼웠다. 훌륭한 능력을 갖춘 다른 장애인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비장애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게 다반사였다. 어쩌다가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능력과 무관하게 자신이 하는 일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기 일쑤였다.

 가정구제기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공근로 일자리를 제공해주었지만, 장애인들이 그런 일자리를 신청하면 대상자 자격 미달이라는 “PH”(신체 장애인을 뜻하는 physically handicapped의 약자) 도장이 신청서에 찍혔다. 1935년 5월 29일의 긴급구호국 뉴욕시 지국장실 점거는 즉흥적인 대응이었다. 고용 문제로 지국장을 직접 면담하고 싶었던 여섯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국장실을 점거해 버린 것이다. 언론들도 그 다음날 오후에서야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어느 농성 참가자의 아내가 엄청난 지원단을 이끌고 왔고, 그 주변에는 그 보다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사기가 충천한 농성자들은 지국장 면담 요구와 더불어 새로운 요구 사항을 추가했다. 즉, 신체장애인연맹 회원들에게 일자리 50개를 제공할 것, 매주 일자리 10개씩 만들 것, 임금은 기혼자 27달러 이상 그리고 독신자 21달러 이상 지급할 것, 장애인 노동자들을 비장애인 노동자들과 분리할 게 아니라 통합시킬 것.

 신체장애인연맹이 공식 출범한 날짜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해스켈은 9일간의 점거 농성과 곧이어 진행된 재판 직후에 결성된 것으로 기억한다. 점거 농성 때부터 연맹이 결성될 때까지 대다수 활동가들 - 이들은 나중에 연맹의 회원이 되었다 - 은 이런저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대응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35년 6월6일에 연행된 피켓 시위자 11명을 대상으로 열흘 동안 진행된 코미디 같은 재판이었다. 오버튼 해리스 판사는 피오렐로 라과디아 시장에게 재판의 사회를 봐달라고 요청하고, 자신을 예수에 비교하고, 자기는 타이티로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 피고인들이 실용적으로 되려면 자신의 헌법적 권리와 인권 따위는 잊어버려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등 괴팍하기 짝이 없었다. “불구자들의 피켓이 해리스를 ‘고문하다’”라고 쓴 신문 기사에서 보듯이 언론들은 촌극 같은 그 재판을 주목하였다. 시위, 피켓들기, 점거, 단식 농성 같은 정치적 행동뿐만 아니라 이런 재판을 통한 홍보에 고무된 장애인들은 정식으로 단체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들은 돈을 모아 사무실을 임대하였으며, 그곳에서 간부들을 선출하고 정기적으로 전술을 논의하였다.

 신체장애인연맹 회원들은 “PH” 도장을 없애고 뉴욕시에 살고 있는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이 노동촉진청(WPA)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얻도록 해주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에서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장애로 인한 고용 차별은 여전히 온 나라에 만연해 있었다. 1936년 5월8일 연맹 회원 35명은 첫 번째 워싱턴 D.C. 순회 시위를 벌였다. 이날 회원들은 장애인 당사자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정부가 전국의 신체 장애인들을 고용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13시간 동안 평상형 트럭을 타고 돌아다녔다. 연맹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촉진청을 점거했다. 첫째는 그렇게 함으로써 대통령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정부의 주요 인사를 면담하겠다는 회원들이 결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지친 시위자들이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점거 이튿날 해리 홉킨스 노동촉진청장을 만난 자리에서, 시위대는 신체적 장애인들에 관한 전국적 실태조사와 아울러 이들을 위한 항구적인 직업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자격을 갖춘 경쟁력 있는 신체 장애인 노동자들이 수없이 많다고 주장하는 신체장애인연맹의 주장을 검증하려면 실태조사가 필요했다. 조사 경비는 노동촉진청이 부담하지만, 그 사업을 적절하게 수행되려면 연맹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시위대가 요구했다. 회원들은 “노동촉진청이 동정이 아니라 신체 장애인들의 고용 차별을 확실하게 근절할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고, <워싱턴스타>가 보도했다. 1936년 8월, 신체장애인연맹은 신체 장애인 고용에 대한 정부 개입 사례들을 10쪽짜리 문건으로 정리한 “신체 장애인들의 처지에 관한 명제”를 루즈벨트와 홉킨스에게 보냈다.

 그 무렵, 신체장애인연맹은 노동촉진청이 뉴욕시 신체 장애인들에게 제공하는 일자리를 구하는데 주력했다. 농인진흥연맹도 이 사업에 동참했다. 신체장애인연맹이 아무리 많은 양보를 얻어내더라도 해고로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이 때문에 연맹 회원들은 1937년 8월에 또다시 워싱턴 D.C.로 가서 홉킨스 청장이 신체 장애인들의 일자리를 확실하게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자금이 부족하여 첫날밤에는 노동촉진청 잔디밭에서 자고 둘째 날에는 워싱턴 기념비 앞마당에서 잤다. 결국 성공하지 못하자, 회원들은 다시 한 번 뉴욕시 신체 장애인 노동자들이 정부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연맹 간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공무원으로 채용되었다.

 일부 회원들에 대한 빨갱이 몰이 때문에 불거진 불화와 더불어 많은 회원들이 개인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신체장애인연맹은 차츰차츰 생명력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약4년 동안 활동하면서 연맹은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사회적 선동이라는 1930년대 정신에 동화되어 비가시적 존재로 살아가길 거부한 연맹 회원들은 장애에 관한 고정관념을 타파했다. 이들은 동정을 구하는 대신 대담하게도 사회적 불인정에 반기를 들어야만 했다. 이들은 다른 유형의 미고용 장애인 노동자들과 연대 의식으로 무장하여 불공정하게 일할 기회를 제한하는 차별에 대항해 투쟁했다. 연맹 회원들은 그 당시 육체노동자들의 일자리 수와 장애인 노동자들이 민간부문 일자리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정부가 장애인 노동자들을 고용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행동과 성취를 통해 회원들은 스스로 자아 인식을 변화시켰다. 해스켈의 말처럼, “그 사람들은 처음으로 피해의식 없이 명예롭게 대중과 대면했다. 우리는 일할 수 있고, 결혼할 수 있고, 자식을 가질 수 있다.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들이 남긴 유산을 잘 알지 못한 까닭에, 그 뒤에 등장한 장애운동 세대들은 자신들의 비전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신체장애인연맹에 대한 대중과 정부의 반응은 모순적으로 나타났다. 연맹 회원들은 공산주의자이자 한편으론 외부 세력의 선동과 지도가 없으면 스스로 저항을 조직할 수 없는 공산주의 앞잡이로 기록되었다. 신체 장애인들은 늘 고용 장벽에 부딪치기 때문에 정부가 이들의 일자리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은 노동촉진청 뉴욕시 지국장 빅터 리더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연맹 활동가들에게 “신체적으로 불구자인데다 정신적으로도 불구자인 골칫거리”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그는 부상군인들한테는 취업 우선권이 주면서 이와 비슷한 장애를 가진 일반 시민들은 고용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긴급구호국 뉴욕시 지국장 크노스는 뉴욕시는 고용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민간 기업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신체장애인연맹의 워싱턴D.C.에서 첫 번째 순회 시위를 했을 때, 홉킨스는 노동촉진국이 장애인 노동자들을 차별한다는 연맹의 요구를 부인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했다. 연맹이 전국적 실태조사 요구서와 뉴욕시 장애인 고용 상황을 분석한 자료가 포함된 “신체 장애인들의 처지에 관한 명제”를 제출했음에도 그들은 이 문건을 무시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자가당착은 장애인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없다고 명시한 정부의 수반이 다름 아닌 장애인 당사자 루즈벨트였다는 점이다.

동전모으기운동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열린 버스데이볼즈(Birthday Balls)는 “춤추자 - 다른 사람들이 걸을 수 있도록(dance-that others may walk)”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고용을 거부당한 수많은 장애인들보다 더 중증 장애인인 대통령의 루즈벨트의 생일 잔치였다. 1937년까지 버스데이볼즈 행사는 전국적으로 7천 건이 열렸으며 참석자는 무려 3백만 명이 넘었다. 행사에서 모금된 기금은 루즈벨트가 설립한 윔스프링스재활센터와 기부자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을 지원하였다. 심지어는 주인공이 없는 날에도 행사가 열렸다. 1945년 1월30일, 루즈벨트는 자기 생일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처칠과 스탈린을 만나 얄타회담을 하기 위해 고단한 몸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이 날 버스데이볼즈 행사는 그의 아내가 주도했으며, 기부금으로 동전모으기운동(The March of Dimes)을 지원했다. 소아마비 유행병을 치유하는데 불필요한 정치색을 없애기 위해, 또 이 행사만으로는 충분한 기금을 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국소아마비재단과 이 단체의 재정사업부라고 할 수 있는 동전모으기운동을 1937년이 동시에 설립되었다. 동전모으기운동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전국소아마비재단은 급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자산 조사도 하지 않고 소아마비 환자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의료 조치부터 보조기구까지 뭐든지 다 들어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보수적인 의학적 견해로 보자면 이런 정책은 위험한 선례가 된다. 개념상 공산주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소아마비재단은 1937년 재단 설립 때부터 1955년 쇼크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소아마비와 싸우면서 몇 가지 기여한 것들이 있었다. 루즈벨트는 소아마비 감염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이 질병을 근절하기로 결심했다. 루즈벨트와 함께 변호사 일을 하던 배실 오코너가 재단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대통령의 명성을 이용하여 소아마비 병균과 싸웠다.” 능력과 결단력 겸비한 오코너는 재단의 설립 목적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그는 쇼크 박사의 소아마비 백신 개발이 곧 성공할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기자, 재단 명의로 돈을 빌려 막바지에 이른 연구를 끝까지 지원했다. 그의 “열성적인” 헌신은 거의 “강박적”이었다. 자식 다섯을 둔 오코너의 딸이 소아마비에 감염되었다고 나중에 털어놓자, 그는 “네가 감염된 소아마비 중에 일부가 내 몸에도 들어있다”고 말했다.

 “동전모으기운동(The March of Dimes)”은 재치 있는 코미디언 에디 캔터가 뉴스영화 시리즈였던 “더 마치 오브 타임(The March of Time)”을 본 따 붙인 이름이다. 캔터는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라디오 쇼에서 청취자들에게 동전을 백악관으로 직접 보내자고 제안했다. 방송이 나간 지 이틀이 지났지만 그 효과는 절망적이었다. 백악관의 어느 보좌관은 동전모으기운동 위원회 측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보게 친구들, 자네들이 대통령을 망쳐놨어. 고작 1,700달러 50센트야. 기자들이 얼마나 모였는지 묻고 난리네. 우린 동전을 셀 시간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말했네.” 그런데 며칠 뒤에 20만 통이 넘는 편지가 도착하자 백악관의 입장이 확 달라졌다. “백악관은 편지 더미에 묻혔다. 백악관 우편취급소의 보고에 따르면, ‘미합중국 정부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다.’” 캔터의 수완 덕분에 동전모으기운동은 전국소아마비재단의 확실한 재정 기반이 되었고, 결국 소아마비 백신 개발을 성공할 수 있었다.

부모가 주도한 장애 어린이 단체들

 미국에서는 1958년에 사실상 소아마비가 퇴치되었는데, 이때부터 동전모으기운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이른바 출생시 결함 때문에 난치성 어린이 장애가 곳곳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1937년부터 1958년까지의 동전모으기운동이 특정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단체들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지만, 부모가 주도한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변칙이었다. 더욱이 소아마비 백신이 개발되고 동전모으기운동이 대성공하였다 해도, 이것이 다른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위한 패러다임이 되지는 못했다. 오직 세 가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병하는 소아마비와 달리 근이양증, 뇌성마비, 척추피열, 다운증, 뇌성마비 등 장애들은 수많은 원인들 때문에 발병하는 선천성 질환들이다.

 다른 유형의 장애인 단체들처럼, 뇌성마비연합은 뇌성마비 장애 어린이들의 부모들이 만든 단체였는데, 이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부모들을 찾기 위해 지역 신문에 광고를 냈다.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은 장애 어린이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의사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946년 3월 <뉴욕헤럴드트리뷴>에 실은 광고를 계기로 뉴욕시 뇌성마비연합이 처음 문을 열었는데, 이 단체는 미국 방방곡곡 수많은 도시에서 결성된 뇌성마비연합의 모형이 되었다. 그 뒤 1949년 모든 도시의 뇌성마비연합들이 모여 하나의 전국 조직체 뇌성마비연합협회를 결성하였다.

 오늘날 지역별 뇌성마비연합은 뇌성마비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평가와 조치, 부모 상담, 가족 지원 프로그램, 주거, 캠프, 주간보호, 워크숍, 경력 개발, 지원활동 같은 직접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협회는 연방정부, 주정부, 지방정부를 상대로 뇌성마비인들과 다른 유형의 장애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입법과 프로그램을 장려하는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뇌성마비연합연구및교육재단은 뇌성마비인들의 운전 기능 향상뿐만 아니라 뇌선마비의 원인 및 예방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다.

 또 다른 부모 단체 사례로는 다운증 어린이 부모인 앤 그린버그가 1949년에 결성한 뉴욕정신지체인지원협회를 꼽을 수 있다. 그린버거는 자신과 똑같은 관심사를 가진 부모들을 찾기 위해 <뉴욕포스트>에 광고를 게재하였다. 정신지체인지원협회 회원이었던 아이더 래퍼포트는 그린버그와 정책적 이견 때문에 1951년에 정신지체및정신발달어린이협회를 별도로 만들었다. 중증 장애인 자식을 둔 그린버그는 자신의 단체가 주로 중증 발달장애인들의 문제에 힘을 집중하기를 원했고, 반면에 중간 정도의 장애인 자식을 둔 래퍼포트는 자기 자식과 비슷한 발달장애인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를 바랐던 것 같다.

 1950년대 동안 부모들과 ARC의 군나르 다이브워드 같은 사람들은 “보호시설에 ... 감금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가들은 발달장애인들이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받을 때 그들이 능력과 잠재력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ARC는 부모들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차츰차츰 발달장애인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단체의 약어의 의미가 바뀌었다. 이를 테면, 예전에는 털사시 ARC라 부르던 것을 지금은 털사시발달장애시민권지원활동가들로 부른다.

 전국부활절실협회는 에드거 앨런이 1922년 오하이오주 일리리아에서 설립한 단체이다. 앨런은 10대였던 자기 아들을 비롯하여 15명이 죽은 전차 사고를 계기로 이 단체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앨런은 사고 현장 근처에 병원만 있었어도 16명이 모두 살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선 병원을 설립하고 나중에는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시설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앨런은 부모들이 발각되면 자식을 시설에 집어 넣어야한다는 사실이 두려워 이동성 손상 어린이들을 집안에 꼭꼭 숨겨놓는 경우가 많다는 자체 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아이들은 의료와 교육 서비스가 절실했다. 앨런은 로터리 클럽을 비롯한 여러 자원봉사자들과 힘을 합쳐 전국불구어린이협회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가 나중에 전국부활절실협회가 되었다. 실협회는 1935년에 사회보장법이 제정된 뒤에 등장한 주정부 프로그램들의 원형이 되었다.

 전국부활절실협회는 원래 전국 규모의 장애인 정보센터 역할을 하였는데, 1929년에는 국제 조직을 별도의 사업부로 만들었다. 이 사업부는 1972년에 국제재활협회로 명명되었으며, 현재 전 세계 각 분야에서 정보 제공과 의견 교환 활동을 하고 있다. 실협회는 처음에는 결핵, 그 다음에는 호흡기 질환을 퇴치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실 판매 성과를 모금 캠페인의 모델로 삼았다. 미국 중산층의 가치관을 반영한 실협회는, 그래서 세계주의적인 도시 센터들보다 작은 마을의 교회 집단들과 더 친화적이었다. 실협회는 미국 각 주마다 하나의 지부를 두고 언어치료부터 운동신경 손상자들을 위한 물리적 장벽 제거까지 여러 프로제트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한편, 앨런은 장애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문제까지 아울렀다. 그는 장애인들이 평등과 독립을 달성하려면 - 자선 대신 - 장애인 교육과 고용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경제적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1920-30년대를 넘어선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그 설립 취지 때문에, 실협회하면 다양한 장애인들 특히 이동성 손상자들의 재활, 주거, 교통, 접근성이 먼저 떠오른다.

포스터 아이와 모금방송

 부활절실협회를 제외하고 이동성 손상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들은 특정 장애, 이를 테면 1937-58년의 동전모으기운동은 소아마비, 뇌성마비연합협회는 뇌성마비, 근이양증협회는 근이양증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단체들은 장애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같은 파편성에 영향을 준 주요 원인은 이런 단체들은 각자 특정 장애를 위한 치료, 또는 그 예방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쇼크와 세이빈이 소아마비라는 급성 전염병을 예방하는 백신을 발견한 것이 그런 접근법을 정당화한 것 같다.

 어린이를 강조하면 기금을 모으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포스터 아이(poster child)는 기발하고 눈길을 사로잡는 (소아마비재단의 모금 사업부인) 동전모으기운동 캠페인에 앞서 웜스프링스 재활센터가 이미 1933년에 모금 활동에 “애처로운 불구자 어린이들의 사진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은 듯하다. 다른 장애 어린이 단체들도 이런 발상을 모방했는데, 특정 장애 단체를 대표하는 올해의 인물로 뽑힌 어린이는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신체, 즉 연민을 자아내는 연약함의 상징을 가지고 있었다. 포스터들이 언급하지 않는 장애인들이 무수히 많음에도 이러한 포스터들은 장애란 어느 정도 어린이들에게 국한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단체들이 채택한 모금 전략들이 아무리 대중의 오해에 기반한 것이라 할지라도 훗날 각종 모금방송들이 사용한 기법들 보다 뻔뻔스럽고 꼴사나웠을까. 진짜 장애 어린이들이 동정의 대상이 되어 무대 위에서 열을 지어 행진하면 TV 스크린에는 모금 액수가 빤작거렸다. 그 돈이 무대에 선 장애 어린이들과 그와 비슷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치료하는데 쓰일 것이라는 암시는 속임수였다. 예를 들자면, 1993년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까지 제리 루이스가 진행하는 근이양증협회 모금방송이 모은 돈의 상당 부분은 방송 경비로 지출되었다. 그 돈이 또 어떤 곳에 사용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리가 모은 돈의 상당수는 근이양증에 걸린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도록 예방하기 위한 유전자 검사를 하는데 쓰인다. 제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탄생을 예방하는 수단을 찾기 위해 모금을 하는 TV에서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포스터 아이와 모금방송이 만들어낸 대중적 이미지는 장애를 가진 성인들의 실재를 부정했다. 장애 성인들도 존재한다는 인식을 거의 하지 않는 장애 소년들에 대한 극단적으로 낙천적이고 소름끼치는 가정을 기록하는 것은 웃기는 짓이다. 모든 장애 어린이들은 성인이 되면 치유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장애 성인들은 이 모든 PR 전략들로부터 자신들은 배제된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떠맡았다. 장애 어린이들이 자신의 모델이 없다면, 어떻게 그들이 생산적인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장애 성인들이 비가시적인 존재라면, 어떻게 그들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모금방송으로 모은 돈이 해롭고 그릇된 사고만큼 가치가 있는가? 장애 성인들은 이런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는 장애 어린이들의 기본 욕구는 모금방송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장애인들에게 불리한 사회적 역할”을 제거하는 권리운동이라고 확신한다.

장애관의 변화

 13 식민지(thirteen colonies) 시대부터 장애인을 격리하던 유산이 온존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권리운동은 상상조차 못했다. 미국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먼저 탈시설화가, 나중에는 장애인 재활에 대한 압력이 거세졌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유명 시인 애이미 로웰은 사회비평가이자 저자인 랜돌프 본의 작품을 신랄하게 묘사했다. “그가 쓴 것들을 보면 그가 불구자임을 알 수 있다. 뒤틀린 육체가 뒤틀린 정신을 낳는다.” 본은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말할 때, 특히 “가끔 인용되었지만 제대로 이해된 적은 거의 없는” 그의 에세이 에서, 그는 “‘자존감’을 획득하기 위한 자신의 심리적 투쟁을 ...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가치를 낮잡아본 사회라는 맥락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소년시절에는 격리시키고 성인이 되어서는 일자리도 주지 않는 낙인화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도망 칠 구멍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롱모어는 본의 이야기가 중요한 까닭을 이렇게 지적한다. “어떤 한 사람이 가치절하와 차별을 받으면 그것은 개인사지만, 십중팔구는 그렇겠지만, 수백만 명이 비슷한 경험을 하면 그것은 사회사가 된다.” 사회학자 어빙 졸라도 장애인에 관한 역사 기록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장애인들의 역사가 없다고 생각이 종종 드는 까닭은 실제로는 이들의 기록된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장애에 과한 역사가 기록되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았던 탓이 일부 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다른 소수자 집단들처럼 자기 역사의 어떤 측면들을 기록할 도구를 전혀 갖지 못한 타자였던 탓도 일부 있다. 생각건대, “역사”는 오직 승리의 역사이며 그 사회 영웅의 역사일 뿐 이런저런 이유로 적응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역사는 아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오랜 세월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되찾으려는 유색인과 여성의 길을 따르고 있다.


 본이 살았던 20세기 초반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매우 심각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본이 뉴욕시에서는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오찬에 초대받고도 입장을 거부당한 정도였지만, 시카고였더라면 그런 자리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체포되었을 것이다. 당시 시카고 조례는 이렇게 경고했다. “추하고 혐오스러운 대상인 병자, 병신, 신체가 절단된 자, 모든 유형의 기형인 또는 이 도시의 공공 도로나 공공 장소에 있도록 허용하기에는 보기 흉한 사람은 그런 곳에서 공중의 눈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본이 교육받을 기회를 얻은 것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대다수 장애 어린이들은 1919년 위스콘신주의 어느 공립학교에서 쫓겨난 뇌성마비 소년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 소년은 다른 학생들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교사들과 다른 학생들이 그를 보면 ‘우울해지고 구역질이 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 당시 장애인들을 문재를 다루던 우생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농인, 맹인, 발달장애인, 심지어는 결핵 환자들까지 분리하고 단종시키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1912년에 오늘날 미국유전학협회의 전신인 미국출산가협회의 우생분과가 이처럼 “사회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계층에 적용할 표준단종법 초안을 마련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16개 주가 단종 법령을 제정했다. 일부 우생학자들은 간질환자나 정신적 장애인, 특히 경증 정신지체인들까지도 안락사시키자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8년 재활법 제정처럼 법률들이 개선되면서 장애인들도 노동에 참여할 능력을 갖고 있을뿐더러 수혜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최종적으로 인정받았다. “노인수당, 유족수당, 실업급여, 장애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장애인 프로그램”을 도입한 1935년 사회보장법은 “장애인 지원은 자선만큼이나 사회적 정의에 관한 문제”라는 인식을 반영한 법률이었다. 장애를 가진 여성 노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몰려든 제대군인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 또 다시 장애인은 고용될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그 여성들은 부엌으로 되돌아갔다.

 더욱이 미국 정부는 그 때까지도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손상을 가진 개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기관들이 발전했다. 하지만 운동신경 손상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애 단체들 가운데 클라이언트들의 일상적 요구사항들을 받아들이는 곳은 별로 없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상호 협력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세력으로서의 장애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이 새로운 자각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것은 능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맹인과 농인의 중요한 쟁점들 - 문자와 언어 - 이 처음으로 장애인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접근가능한 환경을 만들려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회로 재설계하는 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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