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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장애인


관현맹인(管絃盲人) 제도 정창권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교양교직 교수)


 이병훈 연출의 사극 가운데 <동이>(MBC:)라는 작품이 있다. 독특하게도 장악원(掌樂院)을 배경으로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다루었는데, 그래서인지 시청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장악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식구들인 시각장애인 음악인, 곧 '관현맹인(管絃盲人)'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병훈 감독을 비롯한 제작자들이 관현맹인의 존재를 미처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시각장애인이 TV 화면에 나오는 것을 꺼려서 그런 것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궁중잔치 그림  조선시대엔 관현맹인 제도를 두어서, 시각장애인 가운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장악원에서 관악기와 현악기 등 악기를 연주하도록 하고, 정기적으로 관직과 녹봉을 올려주어 자립하도록 하였다. 양인 뿐 아니라 천인 중에서도 선발했는데, 장악원에서 1년에 4차례 이조에 추천서를 올려 사령서(辭令書)를 받아 임용하였다.

 조선시대엔 남녀유별 의식이 심하여 왕비와 후궁 등의 내연(內宴)에 남자 악공들이 들어가 연주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기녀들이 악기 연주와 노래, 춤 등을 모두 담당했는데, 그들만 데리고서는 관현악기를 제대로 연주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부득이 앞이 보이지 않는 관현맹인을 동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원래 이것은 고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삼대(三代: 하ㆍ은ㆍ주) 시대엔 맹인을 시켜 시를 외고 북을 두드리게 하였으니(시를 외워 바른 일을 말하고 북을 두드려 일식과 월식을 막았다고 함), 이는 『주례(周禮)』에서 상고할 수 있다. 그들은 또 악(樂)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본받아 맹인을 장악원에 예속시켜 두고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 때면, 맹인에게 눈 화장을 하고 악기를 들고 들어가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언제부터 장악원에 소속되어 악기를 연주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최소한 세종 6년(1424) 이전에는 설치된 듯하다. 『세종실록』6년 7월 22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맹인 26명이 아뢰기를 "우리들이 각기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으로 직업을 삼아 스스로 생계를 이어왔는데, 근래 국상(國喪)으로 인해 음악을 정지했으니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각각 쌀 한 섬씩을 주라고 명하였다'.

 또 성종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들 관현맹인은 장악원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정확한 숫자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20명의 관현맹인 중에서 4명을 뽑아 종9품의 체아직을 주고, 출근 일수가 400일이 되면 품계를 올려주되 천인의 경우엔 종6품 이상을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관현맹인 제도는 임병 양란을 겪으면서 잠시 폐지되었다가 효종대에 복구되었고, 조성말기인 고종대까지 존속하였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나라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이들의 생활도 무척 어려워졌던 듯하다. 예컨대 『악장등록(樂掌謄錄)』1680년 11월 24일조를 보면, 관현맹인 홍석해 등이 자신들의 녹봉을 복구해달라고 상소하자, 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임금한테 아뢰기도 한다.

조선시대 궁중행사도  "관현맹인 홍석해는 기한 내에 관청에 나와서 호구(戶口)의 현납(現納)으로 직접 소장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그 상소의 사연을 읽어보니, 재주를 시험한 관현맹인에게 급료를 지급하도록 한 사항이 법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후 여러 관청의 인원을 줄일 때 관현맹인과 명과맹인(관상감 소속의 운명과 길흉을 판단하는 맹인)을 함께 줄일 것을 상의했습니다. 지난 정유년(1657) 진연(進宴) 때에 기예를 이룬 자 13명을 뽑아 단료(單料)를 주고 음악을 연습하도록 하다가, 기유년(1669)에 다시 정원을 줄여 지금은 단료를 받는 체아직 5명만 남아 있습니다. 그 뒤에 명과맹인에게 급료를 지불하는 것은 복구되었지만, 관현맹인만은 복구되지 않아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해당 관아에 명하여 법전대로 녹봉을 주어서 굶주릴 염려가 없도록 조치한 바가 있습니다. 재주를 시험한 관현맹인에게 급료를 지급하도록 한 사항이 비록 법전에 있다고는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에 줄여 오직 단료로 부치게 된 것은 경상 비용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 살림이 더욱 어려우니, 이미 감한 녹봉을 다시 복구하려면 그 형편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홍석해 등이 상소한 내용이 절실하다고는 하지만, 지금 시행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냥 놔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임금도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의 의견에 따른다.

 관현맹인의 임무는 궁중잔치 가운데 왕비나 후궁, 공주 등을 위한 내연(內宴)에서 기녀들의 춤과 노래의 반주를 맡는 것이었다. 또한, 그때의 복식은 녹색 명주로 만든 두건을 쓰고, 녹색 명주로 만든 단령을 입었으며, 놋쇠빛 붉은 가죽띠를 띠었다고 한다.

 이들은 조선후기까지 주로 내연에서 연주하였다. 예컨대 영조 20년(1744) 『진연의궤』를 보면, 김진성과 신찬휘, 전득주, 윤덕상, 백봉익 등의 피리잽이, 이덕균과 최덕항 등의 젓대잽이, 최영찬과 박지형 등의 해금잽이, 이필강 등 거문고잽이, 주세근과 함세중 등의 비파잽이, 강상문 등의 초적잽이, 이상 13명의 관현맹인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세종대의 난계 박연(朴堧: 1378~1458)은 이들 관현맹인의 처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 13년(1431) 12월 박연은 임금 앞에서 관현맹인의 어려움을 호소한 뒤, 그들에게 더 높은 벼슬을 제수하고 일반 관원들처럼 사시(四時)로 녹봉을 주자고 요청한다. 또 그는 이 자리에서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강조했는데, 해당 부분만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개 관현의 음악을 익히는 일은 고생을 면치 못하는 반면 점복의 일은 처자를 봉양할 만하므로, 총명하고 나이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음양학으로 가고 음률을 일삼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약 격려하는 법이 없다면, 맹인 음악은 끊어지고 장차 힘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옛날 제왕은 모두 장님으로 악사를 삼아서 현송(絃誦)의 임무를 맡겼으니,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대에 쓰임이 있다면, 또한 그들을 돌봐주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세종은 이듬해 1월 박연이 제시한 사항들을 모두 그대로 따르도록 지시한다.

 이처럼 조선시대엔 관현맹인 제도를 두어 시각장애인의 자립을 유도하였다. 그 결과 시각장애인 음악가가 대단히 많았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상당수 출현하였다. 예컨대 세종대 이반, 성종대 김복산과 정범이 바로 그들인데, 이반은 현금을 잘 타서 세종에게 알려져 궁중에 출입하였고, 김복산과 정범은 가야금을 잘 탄다고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특히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당대 일인자라고 알려져, 아래와 같이 성종 3년(1472) 5월 11일에는 포상으로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관현맹인 김복산 등은 맹인으로서 장악원에 근실하게 근무하니 가긍하다. 병조(兵曹)로 하여금 서반 9품의 체아직을 주고, 1년의 4차례에 2인씩 차례대로 제수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엔 '관현맹인(管絃盲人)'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두어서, 장애인으로 하여금 자아를 실현하는 한편 스스로 먹고 살도록 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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