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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문의 영화이야기


한을 뛰어넘는 소릿길최강문 (요술피리 대표작가)


 극장에서 보고 또 보고, 비디오를 빌려서도 보고, OST를 구입해서 듣다가 마침내 DVD까지 사서 다시 본 영화가 있다. 십 수 년 전 상영된 <서편제>다.

영화 서편제의 포스터  영화의 초입은 30대 남자의 발길을 따라간다. 남도 땅 보성의 산판 초입에 위치한 주막. 남자는 이곳의 유래를 주모에게 묻는다.

“이 고갯길을 소릿재라 하고, 이 주막을 소릿재 주막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왔소만, 그 이름이 댁네 소리의 내력을 두고 생긴 말이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주모, ‘소릿재나 소릿재 주막은 자신보다 먼저 소리를 하던 그분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자신은 그분의 딸로부터 소리를 배웠으니, 그분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며 그 내력을 설명한 뒤 구성진 소리 한 자락을 펼친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임 따라서 갈까보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고 떼 지어 날아가는 청천의 기러기도 다 쉬어 넘는 동선령 고개라도 임 따라 갈까보다…’

<춘향전>의 한 대목 ‘갈까보다’. 어느 순간인가 소리는 중년 남성의 묵직한 목소리로 바뀐다. 바로 소릿재의 전설이 된 그분의 소리이다.

‘이제라도 어서 죽어 삼월동풍 제비 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닐다가 밤중이면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풀어볼까…’

장소도 덩달아 바뀌어 매미 우는 여름날의 시골 밭두렁, 소리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는 먼 산에 부딪혀 잔잔한 울림으로 되돌아온다. 이 들녘에서 코흘리개 소년 동호, 그분 소리꾼 유봉과 그의 의붓딸 송화, 영화의 세 주인공이 운명적인 만남을 이룬다. 그러나 곁을 지나는 마을사람의 평가는 매몰차기 그지없다.

“윤초시댁 생신잔치에 불려온 소리꾼이여. 인제 윤초시도 가세가 기울어서 명창은 못 부르고 떠돌이 소리꾼 하나 부른 모양이야. 허, 참.”

영화의 배경은 1950~60년대 신문물이 밀려드는 시절. ‘왜정 때는 엔까가 판을 치더니 해방되고 나니 양놈들 노랫소리가 판을 치니, 한물 간 소리 배워봤자 앞길이 막막할 거’라는 지적에 떠돌이 소리꾼 유봉은 되려 큰소리를 친다.

“두고 봐라, 판소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 오고 말 거다.”

유봉이 의붓자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장면  이어지는 줄거리는, 간략히 정리하자면 판소리가 판을 치는 세상을 향한 세 사람의 몸부림이다. 소리판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유봉은 의붓자식들이 제대로 소리를 하길 바란다. 송화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동호는 극단적 거부감을 나타내며 유봉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드러낸다. 이들 간의 갈등은 반항과 폭력, 가출과 소리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송화의 눈을 멀게끔 하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너무나도 한국적인 소재를 영화화한 <서편제>에 사실 깜짝 놀랐다. 생전 들을 기회조차 적었던 우리 소리가 어찌 저렇게도 심금을 울리는지, 해외 전지 로케이션도 아닌데 어찌 우리 땅 우리 하늘이 저리도 고운지, 떡 벌어진 입을 다물 길 없었다. 그냥 소리가 아니고, 그냥 풍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했다. 가슴을 휘어 감는 소리, 먼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내 가슴에 포말로 부서지는 듯한 애잔한 장면 장면들….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들녘에서 눈 먼 송화를 이끌고 가는 유봉의 장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 하나가 있다. 봄비 내린 들녘을 흰 중절모에 북을 등에 진 유봉이 눈 먼 송화를 이끌고 간다. 추적추적 발걸음 소리에 유봉이 부르는 단가 <이 산 저 산>이 오버랩 된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 세상사 쓸쓸하구나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는 백발 한심하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두 사람은 점차 나이 들고 지친 모습으로 변화하고, 마침내 눈 내리는 겨울로 접어든다.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 단품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이 퍼얼펄펄 휘날리어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모두 다 백발의 벗이로구나…’

소리가 끝날 즈음 당도한 곳이 바로 깊은 산중의 쓰러져가는 오두막. 바로 소릿재다. 밭은 기침을 내뱉으며 유봉이 말한다.

“주인이 전쟁통에 죽었다는디 이불하고 부엌 살림은 조금 남아 있구나. 소리공부 하기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무얼 먹고 살아요?”

“저 아래 한 스무 채 산다니께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겄냐?”

정말이지 명장면,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한 맺힌 소리 공부를 하는 송화의 모습  이곳에서 시래기죽으로 버티며 송화는 본격적으로 소리공부를 시작한다, 한 맺힌 소리 공부를!
유봉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실부모 한디다가 눈까지 멀었으니 한이 쌓이기로 말하자면 남보다 열 배 스무 배 쌓였을’ 송화가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친 소리’에 다가갈 즈음, 유봉은 유언과도 같은 고백을 내뱉는다, ‘니 눈을 내가 멀게 만들었노라’고.

“니가 나를 원수로 알았다면 니 소리에 원한이 사무쳤을 텐데, 니 소리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더구나. 이제부터는 니 속의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

이렇게 클라이맥스를 넘어선 영화는 잔잔한 울림을 계속 이어간다. 송화를 찾는 동호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지고, 영화 <서편제>의 최고 명장면, 송화와 동호 간의 화해 장면이 나온다.

보성의 나루터 주막에서 어렵사리 만난 두 사람, 해묵은 한을 역시나 소리로 털어낸다. 그렇게 이어지는 두 대목, <심청가>의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과 ‘심봉사 눈뜨는 장면’.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두 눈에 절로 눈물이 흐르기 마련이다, 송화와 동호마냥.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고서 울었다는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송화를 이끌고 가는 장면  “<서편제> 마지막 대목에서 어린아이가 송화의 지팡이를 잡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 득음의 경지를 찾아 나서지만 당대에 한을 못 풀면 다음 세대에 ‘바톤 터치’를 해서라도 한을 풀겠다는 송화의 끈질긴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 서편제는 전체가 한을 주조로 담고 있습니다. 귀중한 눈까지 바쳐서 판소리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한의 몸부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은 보복이 아닙니다. 토끼는 용궁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뭍에 와서 거북이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흥부는 돈이 없어 매품을 팔고, 형수의 밥주걱에 뺨을 맞았지만 부자가 되자 형과 재산을 나눠가졌습니다. 심청이는 왕후가 되고도 한에 맺혀 있었지만 아버지가 눈을 뜨는 것을 보고 한을 풀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특성은 한과 멋과 신명입니다.”

훌륭한 대통령의 훌륭한 감상평.

 한을 뛰어넘은 소릿길의 신명…. 그 탄탄한 구성의 바탕에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청준의 원작 소설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각색은 80년대 마당극과 영화판을 넘나든 재간꾼 김명곤(훗날 국립극장장을 거쳐 문화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어찌된 영문인지, 최연소 재임기록을 남기긴 했지만…)이 맡았고, 감독은 ‘한국영화의 거장’으로 불리운 임권택이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출연 배우들 또한 이채롭다. 각색을 맡은 김명곤(유봉 분)에다 국악예고 출신으로 남원 명창대회 1등에다 미스춘향으로까지 뽑히는 통에 일약 은막의 주인공으로까지 캐스팅되었던 오정해(송화 분), 김규철(동호 분)이 바로 주연급 출연진. 1993년 개봉 당시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백만 관중을 동원했다고 하니, 흥행에도 성공한 셈이다.

 십수 년 전의 묵은 영화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는 까닭이 있다. 외국 작품이 판을 치는 뮤지컬계에서도 <서편제>가 공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서편제>가 영화 <서편제>로 거듭난 것처럼, 뮤지컬 <서편제>도 새롭게 도약할 수 있을까?

 송화 역을 맡은 이자람은 전주대사습 학생부와 일반부 장원을 휩쓴 소리판의 샛별이기에 기대된다. 어려서는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니 너말고 네 아범’이라는 노래를 불러 일찌감치 유명세를 탔고, 얼마 전에는 <2010 사천가>를 각색, 연출, 작창까지 맡아 재간꾼임을 확인한 이자람. 과연 그는 ‘판소리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그분 유봉의 바람처럼 말이다.

붙임) 설명이 늦었는데, 서편제란, 판소리 창법에 따른 한 갈래다. 조선 중기 명창 박유전의 창법을 이어받은 유파로, 섬진강 서편인 나주, 보성, 해남 등지에서 전해진다고 해서 ‘서편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반대로 동편제는 섬진강 동편의 구례, 남원, 고창 등지의 판소리를 말한다. 둘의 차이에 대해 영화 후반부 유봉은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하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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