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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재(한국장애인인권포럼대표

컬쳐포유

어어부밴드-유랑 극단을 넘어서,이범재(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1. 주마간산(走馬看山)

어쩌면 그것은 최대의 속도였으리라. 달리는 말 위에서 세상 보기는, 세상의 풍경 보기는 그 풍경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 풍경의 역사들을 쉽게 거세하리라. 그 때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장면이며 그 장면들의 연속된 편집이다. 이야기와 역사란 것이 쉽게는 말을 통해, 언어를 통해 전달되고 의미 부여되고 각인된다고 볼 때, 주마간산이란 말의 거세, 혹은 언어의 거세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마간산을 관찰 대상에 대한 불완전하거나 피상적 이해라고 해석할 때, 그것은 사실 관찰 대상에 대한 언어적 이해의 거세라고 바꾸어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말/언어적 인식과 보기/시각적 이해가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또한 그 두 개의 인식 과정은 서로 상충하고 서로 다른 의미와 풍경을 낳는다. 우리는 우리 아주머니 세대들의 그 놀라운(사실 아저씨 세대들도 거의 큰 차이는 없지만) 드라마에의 열광을 사실은 드라마라는 보기/시각적 표현 방식에 내재된 이 언어/말적 소통의 과잉과 이 과잉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받아 들이는 특정 세대의 인식/이해 방식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시각적 예술을 해체해서는 가장 말/언어적인 방법으로 즐기고 또 생산하고 있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가 성격상 보기/시각적 이해를 특징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말/언어적 이해를 간과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이해/인식에는 말/언어적 이해가 뒷받침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림/조각으로부터 시작된 시각 예술과 매체 및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인간의 인식에서 보기/시각적 이해의 비중과 중요성을 강화해 왔다. 이제 보기/시각적 이해는 우리의 인식에서 압도적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이에 맞추어 인간을 위한 모든 종류의 표현은 보기/시각적 이해에 많은 정성을 할애한다.
그런데 표현과 표현 대상간의 관계가 일방적인 행위와 영향이 아니므로 해서 이 관계 맺는 방식의 차이나 변화는 어쩔 수 없이 그 관계 맺음의 목적 자체/가치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이성(異性)에 대한 표현에서 과거의 세대가 언어적 이해를 중요시한다면 현세대는 시각적 이해를 중요시 한다. 과거의 세대는 이야기 속에서 한 인간을 이해한다. 훌륭한 집안/착한 마음씨/인간사의 요약에서 비롯된 이해와 사진이나 동영상, 혹은 사진이나 동영상에 대한 언어적 묘사에서 비롯된 이해는(예를 들어 날씬하다는 표현과 함께) 대상에 대한 이해 방법상의 차이와 함께 그 판단 자체를 바꾸어 놓게 된다.

영화는 전통적으로 이 두 가지의 대별되는 이해의 방법을 그 자신의 문법 안에 제도화한다. 미장센과 편집을 통해 영화는 두 극단을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하나의 장면들은 주마간산할 수 없는 깊이와 정체를 보여 준다. 하나의 장면들은 다른 장면들/과정들/생각들과 관계되고, 또 하나의 장면 안에 표현된 개별 요소들은 다른 장면들/과정들/생각들을 상징한다. 거기서 우리는 머물러야 하고 많은 다양하고 상반되며 어쩌면 확신할 수 없는 느낌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 현란하고 숨 쉴 수 없는 장면의 전환 앞에서 우리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개개의 장면들은 오직 그 앞의 주어진 장면들과 가느다란 연관을 보여 줄 뿐이다. 개개의 장면들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펼쳐진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 인식의 마비를 위하여 복무한다고 만 생각할 수는 없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주마간산식 이해/인식의 방법론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비록 그 주마간산이 하나의 해명 가능한 이야기로 우리를 이끌지, 아니면 의미의 소거로 우리를 이끌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보기/시각적 인식은 말/언어적 이해가 보여주는 정체와 말/언어적 이해가 갖고 있는 자기 복제성과 이해의 근친성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결국 그 어떤 경우라도 영화는, 보기/시각적 이해는, 말/언어적 이해의 어떤 정체로부터의 해방이다. 언어는 어쩔 수 없이 사물과 사물의 의미에 사로 잡힌다. 그 때 사물의 의미는 또한 속화된 이해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언어는 적어도 그림보다는 훨씬 권력화 된/타락한 표현 방식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의 장면을 앞에 놓고 여전히 권력화 된 이해에 의존하고 싶어한다고 하더라도(마치 행복한 결말을 고대하는 주말 연속극 시청자처럼) 고흐의 갈가마귀가 나는 황량한 들판의 풍경은 우리에게 섬뜩한 단절을 가져다 준다. 그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회화성은 언어에게 하나의 소격일 수 있다.

2. 미장센인가 편집인가?

현대의 예술이, 특히나 대중 예술이 보기/시각적 이해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또한 그로 인하여 현대의 예술이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보기/시각적 이해를 위해서는 생성과 약동, 끊임없는 변화가 필수적이다. 그것은 쉽게 젊음의 힘으로 연결되고 또한 이 새로운 시각적 이해의 가능성은 기존의 권력화 된 이해와 이해-이해 받기의 영향력을 배제하는(외부적인 영향력을 제외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

새롭게 창출된 시장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항상 기존의 시장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손 쉽고 오래된 방식은 차별화하는 것이다. 이제 말/언어적 이해를 기반 하는 예술, 혹은 그 속성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보기/시각적 이해를 중시하는 경향은 이중화 되어 존재한다. 전통적인 예술은 새로운 예술을 헐뜯겠지만 상관없다. 그것이 어차피 자기, 혹은 세대중심적인 사고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시각화한 대중가요에서(그것은 클래식이라는 장르로부터도 또 과거의 잘 만들어진 대중가요로부터도 차별 받는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스토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뮤직비디오라는 훌륭한 무기와 함께 이미 자신들의 노래 안에 새로운 무기로서 보기/시각적 이해를 자랑하고 있다. 그들은 노래하는 과정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이해하고 있다. 댄스는 육체의 언어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되기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간의 인상이며 이미지로 남는다. 그 노래들은 현란한 교차 편집을 통하여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발산한다. 그들은 이미지로 소통하고 대화한다. 따라서 말/언어적 이해와 소통은 거세되고 노래는 아직도 사회를 지배하는 말/언어적 이해의 線 밖으로 탈주한다.

말/언어적 이해/인식의 속화와 권력화에 저항해온 보기/시각적 경향의 노래는 확실히 하나의 반란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80년대를 휩쓴 댄스음악에게 90년대의 얼터너티브는 하나의 반란이다. 또한 랩은 그 반란의 정점 가운데 하나인 노래의 의미화와 연관된다. 한 때 의미가 거세된 비트나 포즈, 그리고 편집만의 노래가 하나의 반항이었다면 이제 그것은 적어도 대중 예술이라는 분야에서는 하나의 권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 권력에 대항하여 의미화, 말/언어적 이해의 강화를 요구 받고 있다. 그것은 음악이 소위 전통적인 말/언어적 표현의 속화되고 타락한 방식에 저항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 의미의 어쩔 수 없는 소거로부터 되돌아 올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이다.

어어부 밴드는 하나의 미장센을 통하여 이에 대답하고 있다. 그들은 3집 '21c new hair'에서 그 현란한 교차 편집을 접어두고 롱테이크를 통하여 장면을 생성한다. 그 장면들은 한편으로 각각의 머물러 해석해야 할 상징으로 꾸며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의미 생성의 가장 유력한 방식으로서의 말/언어적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이 결합은 어떤 면에서 절충적일 수도 있겠으나 또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일 수도 있다.

3. 유랑 극단을 좆아서

음악이 회화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회화성이 획득된 음악적 양식으로 차용하면 된다. 댄스 음악은 과거에 댄스를 위해 사용되었던 음악을 차용하면 많은 댄스적 요소들을 쉽게 획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회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오페라를 베끼면 된다. 유명한 노래 'Bohemian rhapsody'는 오페라를 베끼므로서 장엄한 회화성을 획득한다. 오페라의 극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이 노래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를 차단하고 노래에 대한 불편한 이해 친근함의 거부 일탈적 이해를 낳는다. 그러나 오페라적 회화성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현재 우리의 현실을 그리기에는 어딘가 낯 설고 이질적이다.

어어부 밴드는 바로 유랑극단에서 그 회화성의 원형을 찾는다. 유랑극단은 하나의 뚜렷한 회화성을 우리에게 안겨 주면서도 동시에 오페라가 갖는 어떤 폐쇄성이랄까 아니면 귀족성 같은 것을 벗어버린다. 거기에는 난장이가 불어대는 나팔과 뿡짝거리는 아코디언과 원색적이나 촌스러운 색감들이 묻어 있다. 거기에는 오페라 하우스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과 이야기들과 육체의 놀림/춤이 있다. 거기에는 오페라 하우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장면이 펼쳐져 있다. 또한 각각의 장면들은 마치 연속극처럼 흘러간다. 노래는 하나의 확실히 이해 가능한 스토리를 말하고 있다. 더구나 그 말들은 유랑 극단식의 이죽거림을 제외하고는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제 우리는 왜 그들이 유랑 극단을 본떴는지 알 수 있다. 유랑 극단을 통해서 그들은 회화성의 소격을 던지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스토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마치 신파를 극하는 유랑극단처럼 그들의 노래는 낯 섬과 익숨함을 동시에 가져다 주고 있다.

4. 타자성, 그 위험한 경계

어어부 밴드의 노래는 만만치 않은 말/언어적 구사력에 의존하고 있다. 노래들은 보통 자연스러운 스토리를 엮어가다가는 어느 순간에 갑작스러운 압축과 비약을 보여준다. 그 압축과 결말들은 쉽지만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표현에 의존한다. '종점 보관소'의 한 구절, '집은 너무 멀어서 돌아 가기가 버거운데' 에서, '버겁다'는 말은 이 구절 전체의 일상성을 갑자기 바꾸어 버린다. 힘들다/어렵다 등의 유사어가 쓰여졌을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버겁다'는 단어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과연 '버겁다'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들의 만만치 않은 언어 구사력보다도 더 이들의 노래를 빛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인식이다. 이 앨범은 통째로 '사회적 타자들'에 관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노래 '초현실 엄마'는 성성의 문제를, '중국인 자매'는 소수민족의 문제를, '레이다 이마'는 장애인을, 또 다른 노래들은 실업자나 부랑자들을 다룬다. 그들이 선택한 이 주제들, 대상들은 명확하게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드러낸다. 그들은 새로운 타자들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소재적으로 이 새로운 '타자들'을 노래한다고 해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이다. 어어부 밴드는 분노하지만 쉽사리 해결하려 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는 그들은 현실이 얼마나 가혹하게 이 '타자들'을 속박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 해결책이 쉽사리 존재할 수 없음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보는 세계는 비극적이다.

비극적 세계의 완전한 해결이란 존재할 수 없다. 아마도 너바나의 광기는 이 비극적 세계의 치유할 수 없음에 기인할 것이다. 어어부 밴드는 이 광기를 조심스럽게 피해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 광기를 조심스럽게 피해 나가는 방법이란 바로 체념이다. 체념을 통해 그들은 이 비극적 세계의 치유할 수 없음을 자기 파괴적인 상태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비극성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분노와 함께 그 분노의 완전한 발산이 아니라 체념이며 그 상호 작용이다.
'중국인 자매'에서 그들은 물질에 속박된 존재들을 몸서리 치며 쳐다본다. 우리를 이 광란의 물질적 억압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중국인 자매를 학대하는 '양복 입은 기름덩어리'조차도 어쩌면 이 비극의 한 부속일지도 모른다. 이 노래에서 그들은 어떻게 이 비극을 해결해야 할 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나 장애인을 다루는 '레이다 이마'에서 그들은 체념의 한 가닥을 보여 주고 또 더 나아가 이 체념이 어떻게 타자와의 균형 있는 관계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아마도 장님인 화자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자기에게는 제 3의 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물오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떠나갔다. 그리고 화자는 말한다. '내가 가진 능력이 그녀에겐 별로인 모양이네'라고. 여기에는 타자들에 대한 어떤 미화도 과장도 없으며 또한 섣부른 화해도 없다. 그러나 이 타자가 인식하는 또 다른 타자인 그녀에 대한 이해는 바로 자기가 이해 받기를 원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비록 그녀의 화자에 대한 이해가 '타자성' 즉 '불완전하고 결여된 존재로서의 타자'에 기반하고 있음을 속일 수는 없으나 그녀의 이해(어떤 면에서는 바로 타자의 이해)를 화자가 '내가 가진 능력이 그녀에게 별로인 모양이네'라고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 즉 타자의 이해를 인정하는 새로운 관계의 모색을 보게 된다.

더욱 적극적으로 그들은 성전환 엄마를 소재로 한 '초현실 엄마'에서 타자성에 대한 힘들지만 가능한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엄마가 동생을 낳아주기 원하는 화자에게 어느날 성전환 수술을 받아 남자가 된 엄마가 울며 말한다. 내가 이제 남자가 되었는데 괜찮냐고 묻는다. 화자는 고민 끝에 말한다. '난 멈칫거리다 엄마의 선택을 존중키로 하며 뺨에 키슬했네'라고. 화자의 태도는 불완전함과 결여된 존재로서의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가능하며 또 과장 없는 해결책이다. 우리는 보통 그 '타자성' 자체에 대해 어떤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완전한 분석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타자성'은 언제나 화해할 수 없는 '타자의 이해/타자의 자기 중심성'를 전제로 한다. 화자는 이 악순환적인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 버린다. 그 힘은 바로 타자성 자체를 하나의 선택으로 인정하는 바로 그 키스, 그 체념의 키스에 기반한 것이다.

5. 한편의 미장센

그들이 어떤 이해 가능한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 항상 이런 스토리-텔링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이 원하는 완전한 소격은 회화적으로 만이 아니라 언어적으로도 과거의 습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리라.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 속에 바로 그 가능성, 유랑 극단식 장치를 통해서 만이 아니라 노래의 각 요소들의 깊이와 상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완전한 소격을 요구하고 있다.

이 앨범에서 그들의 음악적 성과를 결정하고 있는 노래는 '종점 보관소'이다.

더러운 쟁반 같은 태양이 창문 틈에서//망가진 시계를 나에게 보여준 바로 그 시간동안//지독히 추운 방은 얼굴을 얼려 버려서//얼기 전 마지막 표정을 상세히 기록해 보관하네//나는 막차를 타고 집에 가다 잠이 들어서 종점까지 왔다네//어제도 나는 막차를 타고 잠이 들어 종점까지 왔었네//집은 너무 멀어서 걸어가기가 버거운데//비까지 몹시 퍼부어 현재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네//병약한 원숭이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면//이빨에 껴있는 닭고기 조각은 불쾌한 꿈이 돼지//당신은 춤을 추다 차가운 차를 마시다 급히//마지막 표정이 보관된 그 방에 모르고 들어가네// 나는 막차를 타고 집에 가다 잠이 들어서 종점까지 왔다네//어제도 나는 막차를 타고 잠이 들어 종점까지 왔었네//집은 너무 멀어서 걸어가기가 버거운데//난 종점에서 그 표정을 목격하네//비까지 몹시 퍼부어 현재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네//

달리의 그 유명한 그림, 더위, 혹은 그 무엇으로 시계가 늘어져 시간을 현실의 시간 너머로 숨겨버리는 그림처럼, 아니면 그 반대로 이 노래는 시간을 얼려서 마치 쭈그러든 시계처럼 형상한다. 그 쭈그러든 시간은 현실의 시간을 고착해 버리고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종점 보관소에 보관된 시간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 어딘가의 종점에 얼리워져 이미 보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어부 밴드의 노래가 두 개의 극단, 속도와 정체, 말과 시각, 편집과 미장센의 긴장을 탐구하는 긴 여정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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