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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소통

자동차와 시각장애인


장애를 바라보는 마음 하성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실장)


 "장애"라는 말을 생각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물어보면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답을 할 것이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 건 상관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장애"가 사소한 걸림돌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고 태산같이 무거운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장애학 (Disability Studies)"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장애학이라는 말은 이미 4, 5년 전부터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그것을 탐구하고 연구하려는 노력은 그 동안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권포럼에서도 "윤삼호의 장애학"이라는 코너를 운영하고 있으며 몇몇 장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장애학을 나름대로 공부하는 모임을 가진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장애학이 서서히 움트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학이 미국에서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 미국 사람들은 장애를 어떤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장애학이 어떤 방식으로 미국의 장애인정책에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필자가 처음 유학을 생각할 때, 어떤 공부를 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학교를 검색하기 위해 필자는 세 가지 검색어를 가지고 학교 정보를 검색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Disability Studies"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장애학은 '장애를 철학적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노력' 정도로 알려진 상태였지만 미국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애학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여 석·박사 과정을 개설하고 있는 학교를 검색하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교육대학원 내에 재활학이나 특수교육학 석·박사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들이나 교육·문화대학원을 운영하는 일부 대학들에서 그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도 미국인 특히 재활이나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Disability Studies라는 말을 하면 그들은 장애학이 장애를 연구하는 학문 정도로만 이해하고 그것을 어떤 측면 즉, 철학이나 사회학 또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애학이라는 말을 듣고 "그건 장애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냐?", "장애를 어떻게 조사하지?" 등의 질문을 오히려 필자가 받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장애학에 대해 별반 지식이 없던 필자 역시 그들에게 명쾌한 답을 줄 수 없었고 그래서 장애학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몇 분 안에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넘어가곤 했다.

 여기서 누구나 다 아는 장애학의 두 가지 주류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같은 장애학이라고는 하지만 영국의 장애학과 미국의 장애학은 눈에 띄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영국은 장애학을 철학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장애를 정의하고 개념화하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논한다. 그리고 평등이라는 차원에서 장애가 평등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듯하다. 반면 미국의 장애학은 철학보다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적인 측면이 강하다. 장애가 매스 미디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사람들은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등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에서 장애 또는 장애인에게 접근한다. 이러한 장애에 대한 사고의 차이는 영국과 미국의 법률이나 제도에서도 극렬히 드러나는데 영국은 차별금지법을 중심으로 장애를 이유로 하는 어떤 불평등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은 장애인법과 재활법을 중심으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공공의 서비스나 교통수단을 이용하게 하고 고용상의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국이나 유럽은 장애인에 대한 균등한 기회 (Equal Opportunity to persons with disabilities)를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회는 교육, 고용 등의 기회균등뿐만 아니라 접근성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기회를 말한다. 미국은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생활 (Independent Living and Rehabilitation of People who are disabled"를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재활은 직업재활을 의미한다. 결국 시작점은 영국과 미국이 다를지 모르지만, 종착점은 같다. 영국은 철학적 의미에서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먼저 생각한다. 결국 연역적으로 장애나 장애인에 접근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귀납적으로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접근한다. 두 나라의 장애학이 추구하는 종착점은 결국 같아진다. 평등한 고용과 직업재활은 결국 같은 말이다. 영국에서 재활 (Rehabilit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호된 장애인 고용 기관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반면 미국은 장애인을 보호된 고용환경에서 근로기회를 제공하면서도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비장애인들과 통합된 환경에서 일한다고 말한다. 결국 같은 현상을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장애나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장애인정책의 목적은 장애인에 대한 균등한 기회인가? 아니면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생활인가? 필자는 모두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장애나 장애인에 대한 철학이나 원칙이 미미하다. 영국과 같은 노력이 최소한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고 어떻게 정의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시민사회의 노력에서 미국식 장애학에서나 볼 수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런 연구가 우리나라에서 장애나 장애인에 대한 국민대중의 인식을 전환할 정도로 양적·질적 수준이 높지 못했다. 결국 어떤 철학이나 원칙이 없는 상태에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만들어진 제도들이 우리나라의 장애인정책인 것이다. 그러나 보고 들은 것은 많아서 장애인복지법을 비롯한 우리나라 장애관련 법률들의 목적을 살펴보면 구구절절 옳은 말살펴죴혀 있다. 재활, 자립생활, 사회통합 등. 그러나 법률들이 담고 있는 많은 내용들은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멀사펴떨어진 것들이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장애인 활동지원에 관한 법률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동 법의 목적에는 크게 고 들은 목적을 적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장애인의 자립생활지원과 그 들족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의 구체적인 시벉률들위해 마련되고 있는 시벉령이나 시벉규칙에는 급여의 대상난다.는 장애인률들엄격히 규정하고 있률들뿐만 아니라 소득에 따라 본인 부담률을 다르게 적용하는데 여기에 2촌 이내의 혈족의 소득까지 고려하여 활동지원급여의 수급률들위한 본인 부담률을 정한다고 한다. 들족의 부담을 경감하는 것을 목적갼을 목적갼법률에서 2촌 이내적갼들족이 아닌 본인갼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이 마흔이나 된 장애인이 활동지원급여를 받기 위해 형제·자매들의 소득까지 고려하여 본인 부담률을 정한다면 아주 이상한 제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현재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대해 논의 중이며 복지부에서도 장애인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할 것으로 예상됨으로 지나치게 황당한 결론이 날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원칙이나 철학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전하려는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장애나 장애인에 대한 법률, 제도 혹은 정책의 수립에서 철학이나 원칙을 가질 수 있을까? 미국에서 장애학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장애나 장애인에 대한 철학이나 원칙을 정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자. 미국에 대해 필자는 그 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미국이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우리 생각처럼 긍정적이거나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수차례 밝혀 왔다. 장애인법이 있고 재활법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미국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차별당하고 있으며 사회 속에서 분리, 배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많은 조사에서 1990년 장애인법의 시행이후 장애인들은 더 많은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는 연구결과가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장애학은 이러한 장애나 장애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해 연구한다. 또 다양성 (Diversity)라는 측면에서 장애가 인종이나 성별과 같은 다양성의 요소로 여기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나 계층 (Social class and position of people who are disabled)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소수집단을 우대하는 미국의 사회적 주류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실제로 많은 장애인 정책이나 제도에 포함되어 있다. 장애 관련 국가기구의 수장이나 고위급 인사는 장애인 당사자로 임명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들은 장애를 남의 일처럼 여긴다. 우리 생각에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장애인에 대해 덜 적대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행동양식의 이질성을 잘못 해석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한 여름에 코트를 입고 다녀도 속으로만 생각하지 겉으로 이상한 눈길을 주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몸이 뒤틀리고 흰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장애인을 봐도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 결국 그들의 행동양식이 우리 눈에는 장애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미국 장애인 정책이나 제도에는 "비장애인이 누리는 만큼 장애인에게 보장해 준다"는 독특한 원칙이 하나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포함하여 인근 메릴랜드와 버지니아를 대상으로 운행되는 매트로 액세스 (Metro Access)라는 특별교통수단이 있다. 장애인을 위해 운영되는 이 특별교통수단의 운행범위는 도시 지하철이나 메트로버스가 운행되는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결국 비장애인들이 대중교통수단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만 장애인을 위해 특별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시외버스격인 그레이하운드나 매가버스를 타야하는 원거리는 매트로 액세스로는 이동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유학하던 일리노이 주 카본데일에서도 핸디캡 밴이라는 특별교통수단이 있었다. 이 역시 카본데일 시내만 운행했다. 그런데 지역 복지 사무소는 바로 옆에 인접해 있는 다른 도시에 있었는데 이 사무소를 방문해야 하는 장애인은 핸디캡 밴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비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만큼만 지원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혼자서 자동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비장애인의 접근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미국인들의 사고는 그런 활동은 개인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미국시각장애인연맹과 같은 장애인 당사자 단체는 시각장애인의 완전한 자립생활을 성취하기 위해 Blind Driving Challenge라는 사업을 통해 시각장애인이 운전 가능한 차량을 개발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장애나 장애인에 대한 철학이나 원칙이 존재하는 미국에서도 불합리해 보이는 제도들이 존재하며 미국 장애인들 역시 불편함과 불평등 속에서 자신들의 완전한 자립생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 장애인계도 이제 어떤 철학이나 원칙을 수립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장애인 정책에 대한 비전을 가지는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철학이나 원칙이 있는 미국에서도 이렇게 불합리한 제도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철학이나 원칙이 적은 우리나라에서는 말 할 필요가 없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수립되고 시행되는 법률, 제도가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철학과 원칙을 반영한 법률과 제도가 진정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에 의한 장애인의 법률, 제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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