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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애인 예술가 열전1- 장혼편 정창권 (고려대 교양교직부 교수)


 '조선시대 장애인 예술가'라고 하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심지어는 자기 귀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평소 '장애인 예술가'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고, 게다가 현대도 아닌 조선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장애인 중에는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 서예가, 음악가 등 예술가가 대단히 많았다.
조선시대 장애인은 자립(自立)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한데 어울려 살았고, 가급적 직업을 갖고 스스로 먹고 살도록 하였다. 또 양반층 장애인의 경우는 높은 관직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장애인은 오늘날처럼 숨어 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장혼도 역시 한쪽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과 똑같이 집안일을 도왔으며, 책을 사랑하고 시를 아주 잘 지었다. 또 책을 교정하고 간행하는 데에도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동용 교재를 많이 편찬했으며, 직접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혼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시인이자 저술가, 출판인, 아동 교육가였던 것이다.

중인(中人) 집안

 장혼(張混)은 영조 35년(1759)에 출생하여 순조 28년(1828)에 세상을 떠났다. 호는 이이엄(而已?) 또는 공공자(空空子)라 했는데, 이이엄은 한유의 싯구인 '허물어진 집 세 칸이면 그만일 뿐(破屋三間而已)'에서 따온 것으로, 한마디로 자족(自足)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장우벽(1730~1809)은 호가 죽헌으로, 효성과 우애로 유명하였다. 조상의 음덕으로 통례관(나라의 의식을 주관하던 곳)이란 중인의 벼슬을 얻었지만, 일 년이 못 되어서, "어버이가 안 계시는데, 녹봉을 받아서 무엇하리요!" 라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다. 이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가객(歌客)으로 일생을 보냈다. 따라서 그의 집은 매우 빈궁할 수밖에 없었다.
장혼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로써, 직장(直長)을 지낸 곽진원의 딸이었다. 그녀의 품성은 방정하고 엄숙했으며, 또 자상하고 영민하고 지혜로웠다고 한다. 문사(文史)의 뜻을 밝게 이해했는데, 그래서 아들 장혼을 친히 가르치기도 했다.

한쪽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

 장혼은 영조 35년(1759) 8월 4일 인왕산 밑 서벽정(지금의 배화여고 자리)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자매들이 모두 요절하여 홀로 외롭게 자랐다.
그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六歲命不幸一足跛行'), 이후로도 평생 동안 다릿병을 앓았다.
그럼에도 집이 가난하여 손수 땔감을 구해오고 물을 깃는 등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무렵 길에서 한 고관과 부딪쳤는데, 그 가마와 시종이 매우 성대하였다. 다행히 고관은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다. 이에 장혼은 침착하게 나뭇짐을 내려놓고서, 그의 앞으로 나아가 정중히 읍하고 문안을 올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장혼을 매우 기특히 여겼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노력 벽파의 영수인 김종수가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그도 역시 효자로 유명하였다. 하루는 장혼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잘 익은 앵두를 광주리에 가득 따서 어깨에 메고 절뚝거리며 그 집을 찾아가서는 모부인의 장수를 기원한다며 올렸다. 그러자 김종수가 감동하여 자신의 어머니께 광주리를 바치며 말하였다.
"이 앵두는 효자 장혼이 바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붓과 먹으로 답례를 했으나, 장혼은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장혼은 총명한 아이였지만 서당에 다니지 못하였다. 중인 신분이라 문장을 잘 지어도 쓸 데가 없고, 오히려 그 처지를 탄식하며 더욱 힘들게 세상을 살아갈까 두려워서, 그의 아버지가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혼은 9살 때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10여세부터는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시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어서, 그가 한번 시를 읊으면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베껴서 읊곤 하였다.
이후 17, 18세가 되자, 장혼은 집이 가난하여 남의 집 자제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살 때에는 어느 부잣집에서 기식(寄食)하며 그 자식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한번은 스승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의술(醫術)을 배울까도 심각하게 생각해본다. 아마 그 부잣집 자식은 장혼의 말을 듣지 않고 자주 말썽을 피웠던 듯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천명은 의사인들 어찌할 수 있으랴', '의술은 천한 기술일 뿐 내가 일삼을 것이 못된다.'라고 하고서 그만둔다. 대신에 '열심히 문장을 닦아 후세에 이름을 빛내리라.'고 굳게 다짐한다.

아내와 사별 후 홀로 살아가다

 장혼은 24세인 1782년 참봉의 딸과 결혼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결혼한 지 10년만인 1792년 25살의 어린 나이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만다. 두 사람 사이엔 3남을 두었지만, 차남도 일찍 죽고 만다. 장남의 이름은 창(昶), 3남의 이름은 욱(旭)으로, 모두 아버지를 닮아 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장혼은 아내와 사별한 후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데, 아마도 집이 가난하여 재혼할 처지가 못 되거나 혹은 책과 자연을 너무 좋아해서 그러한 듯하다.
실제로 장혼은 평생 동안 지속적으로 가난에 시달렸다. 재주가 있어도 높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중인 신분이자, 게다가 한쪽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의 시를 함께 읽어보자.

평시에도 가난을 견디지 못하거니와
하물며 열흘 동안의 장마에 있어 서랴
땔감 묶어 이불과 바꾸지만
어찌 만족스럽고 부드러운 침구를 얻을 수 있으리
길게 한숨 쉬며 이웃마을 살펴보니
제각기 맡은 일에 분주 하도다
그러나 나만 홀로 하는 일 없어
푸른 산 깊숙이 문 닫고 있네(『이이엄집』권1, <苦霖二旬分積雨空林烟火遲記事> 제2수).


또한 장혼은 책과 자연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시에서처럼 집에서는 아내가 꾸짖고 밖에서는 길가는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독서를 좋아하니
아내가 지극히 용렬하다고 꾸짖고
밖에 나가서는 돌을 숭배하는 것 즐겨하니
길가는 사람들이 족히 공경스럽다고 비웃네
누가 한결같이 기특한 기개로써
큰 뜻 마음에 간직하고 있음을 알랴
아침에는 산위에 떠있는 구름 쫓아다니고
저녁에는 시냇물 쫓아다니네
돌아와 누워서 거리낌 없이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스스로 제후에 봉해짐보다 낫다고 여기네(『이이엄집』권1, <重過松石園各呼硬韻>)


이처럼 장혼은 책과 자연, 혹은 술과 시로써 자신을 위로하며 여생을 홀로 살아간다.

대쪽 같은 교정 솜씨

장혼의 나이 32세인 정조 14년(1700), 임금은 옛 홍문관 터에 감인소를 설치하고 여러 가지 책들을 찍어 널리 반포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교정을 볼 인재를 널리 구하니, 순암 오재순이 장혼을 첫 번째로 추천하여 사준으로 임명케 해준다. 오재순(1727~1792)은 현종의 딸 명안공주의 손자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고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사준(司準)은 교서관의 종8품 잡직으로, 인쇄된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교정을 보는 사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정을 정확히 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교정보는 것은 마치 청소하는 것과 같아서, 한 페이지를 청소하면 다음 페이지에 다시 생겨서 세 번, 네 번 교정을 봐도 오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아주 엄한 벌칙이 있었는데,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한자씩 나올 때마다 볼기를 30대씩 때렸다.
장혼은 인쇄된 책이 원고와 다른 것을 살피며 교정을 보았는데, 그 솜씨가 마치 대를 쪼개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고관들이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또 그가 교정을 잘 본다는 소문이 나자 궁궐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교정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대개 한권의 책이 간행될 때마다 품계를 올려주는 법이었는데, 장혼은 번번이 받지 않고서,
"적은 녹봉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서지만, 영예로운 승진은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사양하였다. 계속 승진하여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어 사직하게 되면, 식구들을 부양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그 뜻을 알고 더욱 많은 녹봉을 내려주었다.
장혼은 모친상을 당한 해인 1815년(57세)까지 약 25년 동안 사준으로 일하면서 관판(官版), 사판(私版) 등 58여종의 책들을 교정했다. 그리하여 정조대의 문치(文治)를 꽃 피우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송석원시사

장혼이 평생 동안 사회적으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은 송석원시사였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정조 10년(1786) 여름 천수경이 살고 있는 인왕산 아래 옥류동의 송석원에서 결성되었는데, 이후 1820년 무렵까지 30여년을 존속하면서 당시 양반 사대부들을 능가하는 활발한 시문(詩文) 활동을 펼쳤다.
이 시사의 중심인물은 천수경(훈장)을 비롯한 장혼(교서관 사준), 김낙서ㆍ임득명ㆍ박윤묵(이상 규장각 서리), 서경창(비변사 서리), 최북(화가), 왕태(술집 중노미), 차좌일(만호) 등 주로 중인층이었다. 그밖에 재주가 뛰어난 평민들로 그들을 따라 노니는 자가 거의 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의 정기적인 모임 이외에도, 대보름, 봄가을의 사일(社日), 삼짇날, 초파일, 유두, 칠석, 중양절,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도 반드시 모임을 가졌다. 천수경의 집인 송석원의 정원이나 산수간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는데,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남기기도 했다.
또한 장혼은 39세인 1797년 천수경과 더불어 위항인의 시들을 널리 모아 『풍요속선(風謠續選)』6권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서 풍요란 민요라는 뜻으로 위항인의 시를 낮추어 이른 말이며, 그것은 1737년 간행된 『소대풍요』를 이은 것이었다. 장혼은 이 시집을 자신이 근무하는 교서관의 활자를 이용해 출간하였다.

원대한 저술에의 꿈

장혼은 40대인 중년 이후에도 결코 재혼하지 않고, 꽃과 책을 벗 삼아 혼자서 살아간다. 특히 그는 날이 갈수록 궁핍함이 심해져 양식이 자주 바닥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보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 많은 책을 내고 싶다는 원대한 저술에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그는 출사(出仕)의 제한을 받는 중인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실력을 갖추어도 세상에 쓰일 수가 없었다. 당시 양반 사대부는 위항인에 대해 시인으로서만 인정했을 뿐,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경세가(經世家)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는 서서히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소박한 꿈을 키워가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원대한 저술에의 꿈'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장혼은 다산 정약용에 버금갈 정도로 평생 동안 많은 책을 저술하거나 편찬하였다. 그 가운데 현대까지 알려진 것들을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시문집
『풍요속선』: 위항인의 시집
『이이엄집』: 자작 시문집
『비단집』: 자작 시집
『이이자초』: 자작 시문집
『시종』: 중국역대시선집
『당률집영』: 당나라의 율시 선집
『고문가칙』: 중국고대문선
『소단광악』: 당시선
『이견』: 사부(辭賦) 선집

2. 아동용 교재
『아희원람』: 고사(故事) 중심의 아동용 교재
『몽유편』: 아동용 어휘집
『근취편』: 아동용 사자숙어, 속담집
『동습수방도』: 아동용 수학 교재
『초학자휘』: 초학자를 위한 자전
『계몽편』: 아동용 교재
『동사촬요』: 아동용 국사 개설서

3. 기타
『정하지훈』: 아버지 장우벽의 훈계와 선현들의 격언
『대동고식』: 단군에서 고려까지의 우리나라 역사
『동민수지』: 우리나라 백성들이 알아야 할 상식을 엮은 책인 듯
『제의도식』: 제의(祭儀)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책인 듯
『사례비요』: 관혼상제에 관한 책인 듯
『문단성보』: 우리나라 문인들의 성명을 정리한 책인 듯
『절용방』: 각종의 생활서식


이처럼 장혼은 평생 동안 많은 책들을 저술하거나 편찬했는데, 특히 그는 아동용 교재 출판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장혼이 처음 만든 아동용 교재는『아희원람(兒戱原覽)』이다. 이 책은 고금의 사적 가운데 아이들이 봐야할 내용을 10가지의 주제로 가려 뽑은 것이다. 그의 나이 45세인 1803년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인데, 이후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 다시 인쇄되면서 명실상부한 전근대 아동용 교재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그런데 남의 활자를 빌려 인쇄하려면 출판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장혼은 스스로 목활자를 만들어 직접 인쇄하고자 한다. 장혼의 목활자는 자체(字體)가 필서체로 되어 있으며, 관에서 주조한 활자에 비해 약간 작고 부드러운 글씨체를 갖고 있었다. 제작 시기는 그의 나이 52세인 1810년경으로 추정된다. 장혼은 이 목활자로 역시『몽유편』,『근취편』등의 아동용 교재와 『당률집영』이란 시집을 처음으로 인쇄한다.
이후로도 그는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다양한 아동용 교재를 출판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계몽편』은 20세기인 1913년에서 1937년까지만 해도 무려 10차례나 간행되어 전근대 시대의 아동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서당

순조 16년(1816, 58세), 장혼은 모친상을 당하여 감인소를 그만둔다. 그리고는 자연에 은거하여 책을 쓰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평생의 뜻을 펼치며 이상을 추구하고자 한다. 특히 그는 이즈음 도가사상에 심취하며 내면적으로 안정과 평온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또다시 모진 가난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에 그는 자기 집 사랑방에 서당을 차리고, 이전에 편찬한 아동용 교재를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완, 고진원, 임유, 유보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면 양반이 아닌 중인들도 서당을 개설할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일반 상민들의 교육열이 대단하여 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개 서당에서의 교육방식은, 선생님이 먼저 교재를 천천히 읽고 한자의 음과 뜻을 일러주면, 학생들은 그것을 따라 읽고 머릿속에 새겼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이 문장의 뜻을 천천히 새겨주었다. 이후 학생들은 그날 배운 부분을 반복해서 읽거나 썼다. 테스트는 서당에 따라 달랐는데, 그날 배운 것을 그날 테스트하는 경우도 있고, 다음날 테스트하는 경우도 있었다. 테스트할 때는 책을 등 뒤에 두고 전날 배운 부분을 암송하고 뜻을 풀이해야 했다. 그래서 만약 제대로 하지 못하면 선생님의 회초리가 뒤따랐다.
또한 서당에서 가르치는 교재는 먼저『천자문』에서 시작하여『동몽선습』,『명심보감』,『통감절요』,『소학』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중인층 이하의 자녀들이 다니는 서당에서는 그러한 양반 사대부 중심의 교재와는 다른, 앞에서처럼 장혼이 편찬한『아희원람』이나『계몽편』등 중인층의 새로운 시각이 반영된 교재가 쓰이기도 했다. 특히『계몽편』은 인간생활에 필요한 실질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는데, 이 책이 출현하자마자 많은 서당들이 앞 다투어 교재로 채택하여『동몽선습』이나『소학』을 밀어내고 그야말로 새로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쓸데없이 나를 미화시키지 말라

장혼은 순조 28년(1828) 9월 13일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김조순, 조만영, 이서구와 같은 양반 사대부 뿐 아니라 많은 벗과 제자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죽기 전에 두 자식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남에게 만사(輓詞)도 부탁하지 말고 제문(祭文)도 받지 말라'고 하면서, 사후에 터무니없는 말로 자신을 미화시키는 것을 경계하였다.
안병태 교수에 의하면, 장혼의 묘소는 1986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대자리 산 155번지에 있었는데, 부인과 합장되어 있고, 아무런 비석도 없이 구릉지로 황폐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장혼은 '중인'이란 사회적 제약, '가난'이란 경제적 제약, '장애'란 신체적 제약 등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시인이자 저술가, 출판인, 아동교육자 등 다양한 역할을 하며 조선조 말기에 그 족적을 뚜렷이 남겼다. 특히 그는 한쪽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를 갖고 있었음에도, 그에 개의치 않고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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