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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라리아를 찾아서


미소가 만든 인연고관철


 원고청탁을 받았다. ‘시네라리아를 찾아서’라는 코너란다. 시네라리아가 뭐지? 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국화과에 속하는 관상용 예쁜 꽃으로 인터넷에 찾아보니 꽃말은 ‘난 항상 행복해요’란다. 그럼 이 코너의 주제가 행복에 대한 것인가? 장애인 중에서 행복한 사람을 찾는 코너일까? 아니면 파랑새처럼 보이지 않는 행복을 찾는 코너일까? 등등 이런 저런 생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근데, 신기한 것은 ‘행복’이란 단어를 접하면 정말 자동적으로 입가에 미소가 접힌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행복이 자신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만든 것이 미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최근 경험 속에서 미소가 가져다준 중요한 사건을 경험했다. 결국 나는 이 코너의 의도는 전혀 모른 체, 미소와 관련된 즐거운 추억으로 결론짓게 되었다. 지금부터 그 인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작년 10월 26부터 11월 6일까지 미국에 갔었다. 캔자스 주 오버랜드파크에서 열리는 APRIL(미국 농촌지역 자립생활센터 연합회)의 총회에서 한국의 자립생활에 대한 발표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근데 캔자스 주는 미국의 중앙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평원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뉴욕이나 로스엔젤리스와 같이 한 번에 바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왕복 교통비는 지급이 안 되는 관계로 싸고 편하게 가기 위해서는 여러 날을 들여서 이곳저곳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마침내 찾아낸 비행기 편은 값이 싼 대신에 조금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서 LA까지 밖에 안 가는 것이었다. LA에서 캔자스시티까지는 다시 미국 내 항공사를 찾아봐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미국 내 지방항공사를 찾아서 직접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게 된 것이다. 여행사를 통해서는 LA까지 가는 비행기 표를 발급받았으나 LA에서 캔자스시티까지 가는 비행기 표는 LA공항의 사우스웨스트항공사에 가서 발급받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혼자 가는 배낭여행인 것이다. 큰 배낭 하나를 둘러매고 인천공항에서 11시간을 타고 밴쿠버에 가서, 다시 밴쿠버에서 2시간을 기다리고서 연결 편 비행기로 갈아타서 다시 LA까지 3시간을 날아갔다. 서울에서 밴쿠버 갈 때까지는 한국인 승무원이 있어서 그렇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LA까지 가는 데는 동양인이 나 밖에 없었고 좌석도 맨 뒤 화장실 옆에서 불쾌한 냄새를 맡으며 가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LA공항에 도착할 때쯤이 되어서는 거의 녹초가 되어있었다. 사우스 웨스턴 항공은 다른 터미널에 있었기에 공항 밖으로 나가서 이 항공사를 찾아가 티켓을 발급 받고 나서 비행기 수속 받는 입구근처에 갔을 때는 주위에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거의 백인계 미국인들뿐이었다. 모든 것을 영어로 해야 하는데 짧은 영어실력으로 어떻게 캔자스까지 용케 찾아갈 수 있을 까는 두려움과 17시간을 앉아있어서 엉덩이에 종기 날 정도까지 녹초가 된 상태의 피곤함에 좀 더 터미널 구경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게이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이런 저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별 다방(난 스타벅스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동양인 아줌마를 보았다. 그 아줌마는 커피를 들고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서양인들 속에서 동양인을 보는 게 일단 마음속에 반가움이 생겼고, 어디 사람일까? 중국인일까 일본인일까? 관광 온 사람일까? 아니면 교포일까?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지만 그렇다고 한국말로 물어볼 수는 없었고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자연스런 영어로 전화 통화를 하다가 마지막에 ‘나 배고파’라는 말이 들리는 것이었다. 아니 이 말은 한국어가 아닌가? 한국 분이셨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분을 보게 되었고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분도 역시 나를 보면서 순간 미소를 지으셨다. 서로 한국 사람이라는 교감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 더하지 못하고 그냥 주변을 더 배회하면서 구경하고 있다가 오직 영어로만 안내되는 탑승 멘트를 들을 때는 ‘마지막에 타야겠다. 앞으로도 3시간을 비행기 안에 앉아있을 건데’하는 생각에 소파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아주머니가 오시더니만 “한국인이시죠?”하고 묻는 것이었다. “네,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더니, 그분이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탑승 방송이 나왔는데 왜 안타시죠?”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전 지금 17시간을 앉아서 한국에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다시 3시간을 가야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있다가 타려고요, 맨 마지막에 타려고 합니다.” 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분이 하시는 말이 “사우스 웨스턴 항공사의 비행기에는 좌석표가 없고 먼저 타는 사람이 자신이 앉고 싶은 곳에 앉는다.”고 말씀하시며 “장애인과 노인, 몸이 아픈 사람은 먼저탈 수 있도록 지금 방송한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순간 밴쿠버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세 시간 동안 맡았던 화장실냄새가 다시 나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아 그럼 탑승 해야죠”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저도 일행이라고 해서 같이 타면 안 될까요?” 그러시는 것이었다. 그때, 맞아 이분이 영어를 잘하시니까 옆에 타면 나도 큰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네 그렇게 하시죠.” 라고 답하고 탑승수속을 바로 하게 되었다. 그분이 영어로 내가 장애인이고 같은 일행이니까 지금 바로 타겠다고 승무원들과 이야기를 하고선 바로 앞장을 서셨다. 비행기로 들어가 보니 다섯 명 정도가 타고 있었고 양쪽으로 세 좌석씩 배열 되어있는 기내에 세 번째 열로 가서 가운데 좌석에 목발을 놓고 양옆에 앉아있었다. 그랬더니 뒤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데 목발을 보고서는 뒤로 가서 앉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뜰 때쯤엔 유일하게 우리 좌석만이 비어있었고 나머지 좌석은 거의 만원상태였던 것이다. 정말 17시간의 괴로움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3시간의 즐거운 비행기여행이 된 것이다.

 캔자스로 오면서 그분은 미국에 이민 온 지 30년이 되었고, 이름은 캐시 박이며, 원래 LA에서 사는데, 캔자스 올렛사의 백화점에서 의류상점을 크게 한다는 것이었다. 자녀도 미국에서 키워서 결혼시켜서 손자까지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LA에는 2주에 한번 오는데 매장에서 팔 옷들도 떼고 손자도 보면서 일주일정도 있다가, 캔자스에서 먹을 LA갈비랑 직원에게 줄 한국산 소주 등 부식들을 사가지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보고는 뭐 하러 미국에서 시골인 캔자스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복지에 종사하면서 장애인운동을 하는 사람이고 캔자스까지는 미국장애인총회에 참석해서 발표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 일주일 정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다면 회의 일정 중 저녁에 쉬는 날 저녁에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음식이 입맛에 안 맞을 테니 흰 쌀밥에 김치찌개해서 같이 저녁먹자고 하셨다. 그리고 내 또래의 직원이 같이 사니 친구삼고 소주 한 잔 하자 신다. 아니,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미국 땅에 와서, 그리고 목장으로 둘러싼 캔자스 시골에서 고국 분을 만나다니? 이건 정말 내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고맙다고 하고나니 어느덧 캔자스공항에 도착하게 되었고, 꼭 다음에 보자고 다짐하면서 연락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2일후에 그분은 호텔근처의 한국인 하는 식료품점에 왔다가, 들렸다며 세미나장에 들르신 것이다. 거기서 나를 초대한 캔자스 주립대 글렌교수님과도 인사하면서 즐겁게 계시다가 헤어지시면서, 다음 날 저녁에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고 하시며 데리러 오시겠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저녁에 데리러 오셔서 집으로 갔더니 조금 있다가 같이 사는 직원이 왔다. 나랑 동갑이란다. 그 친구의 이름은 현경호, 틀림없이 한국인이었다. 온지 10여년이 됐단다. 힘들 때 도와주신 분이라 계속 같이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친구가 됐다. 한밤중까지 김치찌개에 포도주, 데킬라, 소주, 맥주를 섞어먹고 혼수상태가 되었다가 다음날 그분이 하시는 백화점 옷 매장에 가서 양식으로 해장하고 점심 먹고 회의장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에도, 교수님댁에 있다가 다시 그 분의 집으로 가서 마시다만 데킬라를 마저 비우고, 친구와 다시 인사불성이 되었다가, 다음날 가게에서 신라면 으로 해장하고, 그분의 배웅을 받으며 캔자스공항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들은 올해 3월이 되면 캔자스를 정리하고 LA로 돌아가는데, 아주머니는 직원에게 일을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하신단다. 그리고 다음에 미국에 올 때면 LA를 항상 들렸다 갈 생각을 하라신다.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5월경에는 한국으로 휴가를 갈 거라고 하신다. 그때 만나자고 한다. 친구 녀석도 같이 따라올 거란다. 한국에 오시면 제가 제주도까지 안내하겠다고 화답하고 친구에게는 제주에서 회를 사줄 테니 제주 앞바다에서 다음날 해 뜰 때까지 마시자고 했다.

 캔자스 LA까지 돌아오는 비행기는 덴버를 경유하는 편이라서 5시간 걸렸고, LA공항에서는 전날 저녁8시에 도착해서 다음날 7시에 밴쿠버 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12시간가까이를 공항에서 보내야 하는 일정으로 갈 때보다 더 힘든 여정이었다.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미국에 갈 때는 혼자 가는 길이라 조금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피곤했던 여행길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즐겁고 가볍고 자신있어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영어를 전혀 못하는 한국 할머니의 캐나다 입국 수속을 도와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 분과 가족, 친구 녀석이 올 것이다. 기다려진다. 그리고 7월에 다시 미국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한다. 정말 새롭게 조그만 인연이 인생을 크게 바꾸기도 하는가 보다. 결국은 한순간의 미소가 인생의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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