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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문의 영화이야기-


빵이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해최강문 (요술피리 대표작가)


1.
 영화는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지대 숲 속에서 시작된다.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 수풀을 헤치며 황급히 소형 버스에 몸을 싣는 불법이민자 무리 속에 젊은 멕시코 여성 마야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마야에게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그래도 마야에게 호감을 갖는 남성들의 협조 덕분에 어렵사리 대형 빌딩의 청소용역회사에 취직한다. 현장소장의 성희롱을 감내한 덕분에, 게다가 첫 달 봉급을 수수료 명목으로 소장에게 바친 덕분에! 물론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인들 어떠랴? 마야는 열심히 일한다. 쪼그려 앉아 엘리베이터 문 틈새를 닦아내는 마야를 정장 입은 사람들은 마구 넘어 다닌다. 마치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옆 동료가 말한다.
"작업복 이론 알아요? 작업복을 입으면 투명인간이 되요."

비정규직 여준인공 마야-빵과장미 차라리 투명인간이 나았을까? 이들 청소 노동자의 임금은 1982년 시급 8달러 50센트에서 1999년 시급 5달러 75센트로 줄어들었고(영화의 배경은 2000년이다.), 의료보험과 병가, 휴가 혜택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노동조건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2분 지각했다는 이유로 나이 많은 여성 청소부가 해고되고, 이 일을 계기로 마야는 노조 활동가 샘을 찾아간다.


2.
홍익대청소용역비정규직  2011년 1월 3일 새벽, 서울 홍익대학교에서 오랜 기간을 일 해온 170여 명의 청소/경비/시설 노동자들은 '계약이 종료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홍익대학교측은 이들로부터 대기실의 열쇠를 반납 받고, 출입문 비밀번호를 바꾸었으며, 경비실의 자리마저도 빼앗았다.
용역회사는 '대학 측과의 계약이 종료됐다'며 손을 놓아버렸고, 대학 측은 '용역회사와 당신들 간의 문제이니 우리는 상관없다'고 발뺌했다. 지난 해 12월 2일에 홍익대학교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했으니, 딱 한 달 만에 벌어진 해고사태였다.

3.
 샘은 마야의 동료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한다.
"청소용역업체가 있고, 건물 입주자가 있어요. 입주자는 말썽을 싫어해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입주자를 압박하는 거예요."
가두시위 등을 통해서 입주자에게 항의를 전하면 임금을 올려주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걸 그들도 알게 될 거라는 설명이다.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다른 청소용역회사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유도 한다. 그러나 샘의 설명을 적은 종이는 청소용역회사 소장의 손에 들어가고 만다." "너희들이 무척 똑똑한 줄 알지? 은밀하게 회의한 거모를 줄 알고? 우린 너희보다 더 똑똑하다. 잘 들어. 노조는 안 돼. 노조 새끼들이랑 얘기하다 걸리기만 해봐. 즉시 잘라버릴 거야."

직원들에게 말하는 소장 직원들을 모아놓고 큰소리를 치는 소장, 선임 노동자에게 관리직 승진을 미끼로 누가 노조와 연결되어 있는지 캐내려 한다. 그러나 선임은 어깨 짓만 으쓱댈 뿐, 알려주지 않고, 소장은 그부터 잘라버린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자신의 권리를 깨달은 마야와 동료들은 노동조합에 가입, 샘과 함께 근로조건 개선운동에 나선다. 첫 요구는 시급 5달러 75센트를 인상해 달라는 것.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난 빌딩 관리인은 "청소부 고용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급여도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니, 용역업체 대표에게 따져라"며 이들을 외면한다.
입주자들을 압박하기 위해 샘 등은 빌딩의 지분을 소유한 법률회사의 행사장에 몰래 들어가 난장판으로 만든다. 텔레비전 뉴스에 나올 정도로 여론의 관심을 불러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어지는 용역회사의 대답은 집.단.해.고다.

4.
 그간 새벽부터 대학 강의실과 복도를 치우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지급된 한 달 급여는 고작 75만 원선.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인 시급 4110원을 적용한 것으로, 2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인 85만8747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식대라고 지급되는 것도 겨우 9000원. 30일로 나누면 300원으로, 껌 한 통 조차 살 수 없는 푼돈에 불과했다.
급여수준만 열악한 것이 아니었다. 일찍 출근해서 일을 더 하더라도 시간외 수당은 없었다. 이들에게 더욱 설운 것은 차별과 무시였다. 점심시간에는 건물 밖을 자유로이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됐다고 한다. 투명인간이 되기를 강요당한 것이다. 그간 폐지며 고철을 모아 팔아서 근근이 식대에 보태왔는데, 그마저도 학교에서 금지시켰다고 한다. 학교 자산이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노조를 결성했다. 가입신청서를 받는 데는 일주일도 채 안 걸렸다. 노조 가입률 100%. 그만큼 바꿔보고 싶은 게 많았다. 최저임금 보장, 폭언 금지, 식비 지급, 식사 공간 확보, 휴가 실시…. 넉넉한 급여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올해부터 적용되는 법정 최저임금인 시급 4320원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였다.

5.
홍대 비정규직 노조  마야와 그 동료들이 기댈 곳이라고는 집단의 힘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들은 다른 청소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행진을 나선다. 피켓마다 해고된 동료 청소부들의 사진이 큼직하니 붙어있다. 그 뒤로 따르는 대형 현수막에 쓰인 문구 '우리에겐 빵이 필요하다. 하지만 장미도 필요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서 딱 한 해가 모자라는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시간을 주 56시간에서 54시간으로 단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성과 어린이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공장마다 일괄적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기계 가동속도를 높여서 생산량은 그대로 유지하되, 임금은 삭감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당시 주력산업이었던 섬유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근로조건 악화에 맞서 파업을 벌이면서 이 구호를 처음 내걸었다. 먹고 사는 생존권만큼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릴 권리도 필요하다는 하나의 절규였다.

비정규직 노조의 시위 모습  행진의 끝자락에 마야가 근무했던 빌딩의 1층 로비를 점거한 청소 노동자들에게 샘은 말한다. "누구도 장미를 거저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장미를 얻을까요? 비굴함을 떨쳐버리고 함께 뭉쳐야 합니다." 경찰이 들이닥치고, 이들은 모두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간다. 이곳에서 듣게 된 반가운 소식. 용역회사에서 노조를 인정하고 협상에 응하며, 해직 노동자들을 모두 복직시키고 의료보험과 유급휴가도 주겠다는 전갈이다. 비록 갇힌 몸이지만,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한다, 터져 나오는 기쁨을 이기지 못한 채.

6.
홍익대 비정규직 노조의 여락한 환경  그렇게 농성을 시작한 지 49일째 되던 지난 1월 20일, 민주노총 공공연맹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과 홍익대학교 관련 용역업체들은 집단 해고되었던 청소/보안/시설직 노동자 전원을 집단 고용 승계하는 협상안에 합의했다. 법정 최저임금을 살짝 웃도는 임금인상과 주5일 8시간 근무제도 시행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세간의 비난을 불러 모았던 한 달 식대 9000원은 5만원으로 상향되었고, 비록 적은 액수이긴 하지만 명절 상여금도 책정되었다. 시간외 수당의 보장도 명문화되었으며, 노조 사무실을 마련하고, 노조 전임자의 활동도 보장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유달리 추웠던 겨우내 대학 건물의 한 켠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오랜 점거농성을 벌여온 성과였다. 그간 대학 총학생회로부터 '외부세력은 들이지 마라', '여러분의 생존권만큼이나 학생들의 학습권도 중요하다'는 말까지 들으며 외롭게 벌인 싸움이었지만, 수많은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힘을 모아주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먹을거리를 갖고서 방문, 격려해주었다. 배우 김여진, 방송인 김제동과 김미화, 소설가 공지영 등도 이들의 편에 함께 섰다. 그렇다, 빵과 장미는, 모두가 힘을 모을 때 더욱 분명히 얻을 수 있다!

7.
빵과장미 영화포스터  영화 <빵과 장미>의 여주인공 마야 역할을 한 배우는 솔직히 말하자면 좀 생소하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 샘의 낯은 무척이나 익다. 비쩍 마른 체구에 갸름한 얼굴, 그 가운데로 정말이지 부자연스러운(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더더욱!) 매부리코의 주인공, 에이드리언 브로디다. 2002년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서 보인 강렬한 연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가 영화 <빵과 장미>의 대본을 받아본 직후 한 일이 바로 노동조합에 위장 취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배우보다 사실 감독이 더 유명하다. 영국 출신의 감독 켄 로치.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받은 거장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1995),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정도만 소개되었지만, 1960년대부터 노동계급을 위한 영화를 많이 만들어왔다. 자신의 스튜디오 외벽에도 큼지막하니 이런 구호를 써 붙여 두었다고 한다.
'소수를 위한 맹세!'
그 맹세를 지켜온 까닭일까? 지난 1980년대 영국의 보수주의 물결 속에서 대처 수상의 노동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영화들을 줄줄이 만들었다가 적잖은 시련도 겪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2000년에 만든 영화 <빵과 장미>, 불행히도 2011년 한국의 노동현실에 그지없이 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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