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윤삼호의 장애학이야기

미국 장애 운동사


제2장 촉감으로 보고, 손짓으로 듣고번역 : 윤삼호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소장)


 맹인들은 루이 브라유가 1829년에 만든 격조 높은 만질 수 있는 글자를 원했다. 영어 문법 및 어순 법칙을 따르는 브라유 점자 시스템은 맹인의 사회통합에 기여했다. 한편, 농인들은 자신들을 청인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의사소통 수단인 시각적 구문〔가령, 문법수화-역자 주〕를 요구했다. 농인 통합이란 명분으로 농인들은 구화를 강요당했는데, 이는 수화 습득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맹과 농의 비교

 맹인들은 다른 장애인들처럼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만 했고, 농인들은 자신의 인간다움(humanity)을 입증해야만 했다. 올리브 색스는 ≪Seeing Voices≫에서 농이 맹보다 문제가 덜 된다는 생각은 오류일 수 있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후천적 농이 후천적 맹보다 “더 나은지”는 논란거리지만 선천적 농이 선천적 맹보다 훨씬 더 심각한 건 확실하다. 부모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언어 습득 전 농인들(the pre-lingually deaf)은 조기에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언어 이해력이 심각하게 지체된다. 또 인간의 언어 능력에 결함이 생긴다는 것은 가장 절망적인 재앙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인간의 영역과 문화에 완전하게 진입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하고, 정보를 획득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립되고 말 것이다.


 로마법은 농인을 “정신지체인”으로 취급하였다. 농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을 받을 수 없고, 특권과 의무에서 배제된 “추방된 자”가 되었다.” 근대에 와서 의사소통 장벽 때문에 “농아”란 말은 듣지 못하는 바보라는 의미가 되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 농인들은 권리와 유산을 박탈당했다. 스페인의 베네딕트회 수도사 페드로 폰세 데 레온이 구화법을 고안했는데, 그 이유는 농인 귀족들이 상속법의 요건에 맞게 구화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늘날 구화법은 농인들이 자신들의 ‘농(Deaf)’〔장애로서의 농(deaf)과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문화를 구성하는데 커다란 비극”이 되었다.

 구화법은 극소수 중증 농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나마도 대부분은 언어 습득 후 농인들(the post-lingually deaf)이다. 난청인 들은 구화를 사용하고 중증 농인들은 수화를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예전부터 농인 사회에서 구화 능력은 정치적 자산이었기 때문에 수화 사용자들은 불이익을 받았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농인 4년제 대학인 갤로뎃대학교의 1988년 투쟁은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투쟁 이후 농 운동은 구화를 사용하는 농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반대로 맹인들은 1921년에 설립된 미국맹인재단 같은 단체에서 지도력을 행사한 지 오래되었다. 이 재단의 초대 상근 사무총장 로버트 어윈은 5살 때 맹인이 되었다. 그는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교육과 고용을 비롯하여 모든 생활 영역에서 맹인들이 통합되도록 강력한 지원활동을 펼쳤다.
특히 1880년 밀라노세계농교육자회의 이후에 농인 단체의 지도력과 맹인 단체의 지도력은 사뭇 달라졌다. 당시 회의에서 농인 당사자 교육자들은 투표에서 배제되었고, 그 결과 구화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학교에서 수화 사용이 금지되었다. 미국에서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새뮤얼 그리들리 휴, 심지어 “진보 교육의 수호신”이었던 호러스 만 같은 저명인사들마저도 구화 운동에 앞장섰다. 그 뒤 약100년 동안 농인 어린이들에게 구화 교육을 시킨 결과, 고립되고 무식하고 힘이 없는 거대한 농인 집단이 만들어 졌다. 그러니 농인들은 1980년대 까지도 자기들한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에서조차 지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을 수밖에..

수화와 구화

 구화 지지자들은 농인 어린이들의 수화 사용을 금지시킴으로써 이들의 고유한 생물학적 적응 메커니즘을 앗아 갔다는 점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다. 청인 세계의 의사소통 경로는 “입에서 귀”지만, 농인 세계에서는 “손과 얼굴의 제스처에서 눈“이다. 로라 그로스는《마서즈비니어드 섬사람들은 수화로 말 한다》에서, 수화가 또 하나의 언어로 인정될 경우 농인들이 다른 주민들과 한 덩어리가 되고 심지어 그들보다 더 큰 평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마서즈비니어드 섬 주민 1/4이 농인이어서 “지역사회 전체가 수화를 익혔고, 청인과 농인의 완전한 교류가 가능했다. 농인들은 전혀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언어를 “정신 기관”으로 생각하는 인지과학자들이 옳다면, 언어는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권리”, 즉 거미집짓기가 거미의 존재 조건이듯이 언어는 기관화된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서의 본능이다. 따라서 밀라노회의에 참석하여 농인 어린이들에게 “음성” 언어를 강요한 농 교육자들은 부지불식간에 학습자의 뇌 구성을 함부로 바꿔버린 셈이다. 더욱이 그들은 현대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보편 문법”인 농인들의 수화를 침범하였다. 보편 문법을 지지하는 농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농인 어린이들이 비슷한 제스처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단순한 조합에서 복잡한 조합으로 수화를 전개함으로써 일종의 제스처 문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밀라노회의의 목적이 농인의 사회 통합이었다 할지라도 그 방법은 옳지 않았다. 음성언어든 손짓언어든, 언어는 의도적으로 만든 발명품이 아니다. 언어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생물학적으로 구분되는 특정 집단에 적합한 하나의 프로세스로서의 복잡한 체계들, 즉 무의식적으로 발전한 구조물이다.

 1880년대 때 생긴 구화주의는 퇴행적인 농 교육 방식이다. 1750년대 아베 드 레페는 가난한 파리 농인들에게 선교를 하려면 수화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인 토마스 갤로뎃은 파리에서 드 레페의 훌륭한 교육 방식을 직접 목격했다. 수화도 모르고 교육 경험도 없었던 갤로뎃은, 그곳에서 농 교사 로렝 클렉을 설득하여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1817년에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농 학교를 설립했다. 중증 농인이었던 클렉은 드 레페가 파리에 설립한 국립 농아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북미 수화는 파리 수화와 미국식 영어가 결합된 것이었다.
농 교육이 진보할 조짐이 나타났다. 링컨 대통령은 1864년에 콜롬비아농맹학교 총장 에드워드 갤로뎃 박사(토마스 갤로뎃의 아들)가 학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그렇지만 농인 어린이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구화주의가 우세했다. 그 결과, 자연 언어를 빼앗긴 농 학생들의 교육 효과가 떨어지고 농인들은 사회화와 고용에서 더 분리되었다.
밀라노회의 당시 미국 대표단은 완전한 구화 방식에 반대표를 던졌지만, 1900년대까지 구화법은 미국 농 교육의 토대였다. 이 때문에 많은 농 교육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19세기 농인들은 독자적인 신문, 클럽, 노동조합, 각종 회의를 갖춘 잘 조직된 집단이었다. 하지만 진화론과 우생학이 확산되면서 농인들은 특유의 “씨족 적” 행동 양식 때문에 오직 그들끼리만 결혼할 것이며, 그래서 더 많은 농인 어린이들을 양산할 것이라고 주장이 제기되었다. (실제로는 농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이들 대부분은 들을 수 있다.) 농 교육자들은 농인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농인들을 청인 사회에 통합시키려면 수화를 금지시키고 농인들도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인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그들이 알 턱이 없었다.


 의사소통 장벽 탓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기 일쑤였던 농인들은 그들만의 클럽을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구화법을 강요받았지만 클럽에서는 수화를 사용했다. 이런 클럽을 통해 농인들은 인간관계를 증진하고,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고, 농인 의식을 함양했지만 자기 주변의 농인들은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장애인들도 대부분 동질적인 집단에 참여했음에도 농인들의 이런 행동은 구화법의 효과를 문란하게 만드는 짓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농인의 언어인 수화와 그 언어에서 비롯된 농 문화는 클럽에서만 은밀하게 나타났다. 인들은 구화 교육 때문에 생긴 수치심을 간직하고 있어서 자신들의 자연 언어인 수화는 오히려 멍에가 되었다. 농인들의 굴욕을 안겨주었던 수화는 최근에서야 공공장소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수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걸 보면, 이 언어의 잠재력이 아주 커졌음을 알 수 있다.

평범하면서도 율동미가 있는 시각적 양식을 갖춘 수화는 구전된다는 면에서 고대적이지만, 시각 매체에 천착한다는 면에서 보면 포스트 모던한 예술적인 외양을 보여준다.
미국수화(ASL) 문학은 포스트모던한 음영시인의 전통을 보여준다. 농인들의 소설, 시, 민속 연구적 언어 게임은 (“입으로 말하는 단어”처럼) “손으로 표현하는 기호”를 통해 오랜 세월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구전이 기록되고 보존되듯이 비디오 기술의 발달로 이제 엄청난 양의 미국수화가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시각 기술이 미국수화 문학에 끼친 영향은 인쇄술이 기록 문학에 끼친 영향에 비견할만하지만, 그런 기술의 함의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농인들의 언어와 학습 잠재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많은 농인들이 제약을 받았다. 마서스비니어드 섬에서처럼 수화가 동등한 언어로 인정받을 경우 농은 더 이상 결점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농인들이 그렇게 통합된 환경에서 사는 건 아니다. 농인들이 지역사회에 통합되어 있더라도 다수집단과 다른 언어로 생활한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맹인들한테는 농인들이 겪는 장애물들이 없다. 그러나 문자 언어를 읽을 수 있는 터치 시스템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맹인들도 읽고 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점자와 음성 도서

 농 교육자들이 수화를 인정하기 전부터 농인들은 자연수화를 사용했다. 이처럼 미주리맹학교 학생들은 맹 교육자들이 점자를 인정하기 전인 1854년부터 점자를 사용했다. 점자의 단순성 때문에 맹인들은 손가락을 사용하여 읽고 철필을 사용하여 쓸 수도 있었다.
1829년 왕립 파리 맹학교 출신의 젊은 맹인 교사 루이 브라유는 샤를 바르비에의 기법을 변형한 새로운 점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바르비에는 발음 체계를 본 따 12개의 점으로 된 직사각형 모양의 격자(12-unit cells)를 만들었으나 브라유는 알파벳 문자 방식에 따라 6개의 점으로 된 직사각형 모양의 격자(6-unit cells)를 만들었다. 나폴레옹 군대 장교였던 바르비에는 야간에 글을 적기 위해 경첩이 달린 철판에 종이를 고정시키고 뾰족한 도구로 구멍을 뚫어 생긴 돌출된 점으로 군사 암호를 만들었다. 바비에르가 브라유가 다니던 파리 맹학교에서 자신의 발명품을 선보였을 때, 브라유는 돋을새김 된 점자로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라유가 맹인들에게 남긴 유산은, 우선 그가 촉각으로 쉽게 감지할 수 있는 표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 것이다. 브라유의 6-점자 격자는 각각 63개의 조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쓰는 단어뿐만 아니라 알파벳 문자와 구두점으로 각각 특정한 조합을 만들 수 있다. 브라유 점자를 조합하면 언어뿐만 아니라 음악 표기법, 원소주기율표, 수학 체계 같은 질서가 있는 모든 배열에 적용될 수 있다.
브라유 점자는 1854년 프랑스에서 처음 공인되었고, 뒤이어 1904년 영국, 1932 미국에서 공인하였다. 프랭크 홀이 1890년에 발명한 점자기(Braillewriter) - 건반처럼 생긴 자판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글자를 만드는 기계 - 는 점자 표준화를 촉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일관된 점자 체계를 갖추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점자법이 각양각색이었고 학교들마다 지방자치단체들마다 다양한 터치 시스템을 채택한 탓이었다. “점들의 전쟁(war of dots)” - 양립 불가능한 점자 체계들 사이의 경쟁 - 속에서 결국 맹인들만 손해를 보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특정 점자 체계로 출간된 몇몇 서적들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하나로 통일된 점자 체계는 하나로 정립된 수화에 비견된다.

 맹인들은 점자를 알더라도 점자로 된 책이 많지 않아서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토마스 에디슨이 1877년에 발명된 축음기 덕분에 녹음된 텍스트를 활용할 수 있어서 맹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서적의 수가 늘어났다. 이것이 미국맹인재단의 노력으로 “음성 도서”로 발전하였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등장하면 일반인들이 먼저 사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LP 음반은 맹인들이 먼저 사용했다. 맹인용 음성 도서가 상업용 LP 음반보다 14년이나 앞서 나왔다. 선정된 녹음 물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 -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명 배우였다 - 이 적은 보수를 받고 자신의 목소리를 제공했다.
미국맹인재단은 전기공학 기술자 한 사람을 고용하여 저렴하고 오래 쓸 수 있는 음반과 재생 장치를 개발했다. 또 의회를 설득하여 음성 도서에 예산을 지출하도록 하고, 저작권 보호를 이유로 맹인을 위한 녹음에 반대하는 저자와 강연자들에 맞서 싸웠다. 헬런 켈러의 요청을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5년에 노동 촉진청이 재생기를 제조하는 것을 허용하는 행정 명령을 발표했다. 대통령이 재생기의 가격을 낮추도록 명령함으로써 더 많은 맹인들이 그 기계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점자보다 더 편리한 음성 도서는 맹인들의 학습 잠재력을 높였다. 몇 년 뒤, 음성 도서는 맹인뿐만 아니라 학습 장애, 운동신경 장애 같은 다양한 손상을 가진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었다.

맹인의 이동: 안내견과 흰 지팡이

 맹인에게 이동이란 독립, 즉 보호받는 생활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일반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왕래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맹인들은 늘 지팡이와 개를 길잡이를 활용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1차 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맹 사회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면서 안내 견에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맹인이 된 사람들이 처음으로 개를 길잡이로 이용하였는데, 일반 맹인들도 그들을 따라했다.
맹인들은 걸을 때 지팡이를 탁탁 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를 보낼 수 있고 자기 주변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반향(echoes)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따가닥거리는 말발굽과 시끄러운 쇠 바퀴가 빠르고 조용한 고무 타이어를 장착한 자동차로 대체되면서, 맹인들은 눈에 잘 띄도록 끝 부분을 빨갛게 칠한 흰 지팡이를 사용했다. 1930년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시는 자동차 운전자들이 흰 지팡이를 짚은 사람들에게 통행권을 양보하도록 강제가 조례를 제정하였다. 그 뒤 1931년에는 일리노이 주가 흰 지팡이법(White Cane Law)을 제정하였다. 미네소타 주 상원의원이자 맹인이었던 토마스 샬이 1935년 자동차 사고로 죽자, 미국맹인재단은 흰자팡이 운동을 전개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흰 지팡이를 공급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이동교육(mobility instruction) - 맹인들에게 흰 지팡이를 이동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전문 교육 분야 - 이 정식 직종이 되었다. 맹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이동 도구는 걸어갈 때 좌우로 두드리는 끝이 뾰족한 연필 형 지팡이였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는 아직은 소수지만 고정된 굴림 형 지팡이를 사용하는 맹인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굴림 형 지팡이는 덜 두드려도 전통적인 지팡이보다 물체의 표면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전해 준다.

야코부스 텐브록과 전국맹인연맹

 안내견과 지팡이를 사용하면서 맹인들은 이동성과 독립의 증대를 경험했는데, 이는 맹인들의 조직화, 교육과 고용 기회의 확대로 이어졌다. 1940년 펜실베이니아 주 윌키스-바에서 야코부스 텐브록이 주도한 전국맹인연맹은 창립총회에서 사회보장법에 자산조사 없는 맹인연금 지급 규정을 신설하라고 요구했다. 1944년에 덴브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산조사, 예산, 개별적으로 결정되는 개인의 욕구, 그리고 사회복지사의 넓은 재량권을 고집하는 구제 제도를 반대한다. 그런 것들이 확실한 억압의 수단임을 우리는 겪어봐서 알고 있다.”
텐브록은 전국맹인연맹을 미국노동연맹에 견주어 이렇게 설명했다. “조직된 노동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듯이 전국맹인연맹은 맹인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조직의 구조, 목적, 활동의 유사성 때문에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노동자 특유의 연민과 그들이 처한 삶이 조건 때문에, 조직된 노동이 더 보편적으로, 더 물질적으로, 더 도덕적으로, 더 정치적으로 응수하고 있다.” 그렇지만 보호 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 노동자들은 결사의 권리가 없기 때문에 최저임금법의 보호는 물론이고 실업수당마저도 받지 못했다. 이런 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경쟁적인 환경에서 기능할 수 있음에도 능력 부족이라기보다 차별 때문에 기회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일터에 얽매여 있었다.
텐브록이 추구한 것들 가운데 일부는 30년 뒤 장애 활동가들의 목표가 되었다. 그는 미국공무원법을 개정하여 맹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맹인의 평등을 주장했다. 또 전국맹인연맹과 맹인을 위한 서비스단체를 구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국맹인연맹은 맹인들을 대변하는 단체가 아니라 맹인들 스스로가 뭔가를 주장하는 단체”라고 했다. 맹인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1957년 케네디-베어링 법안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실패한 법률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전국맹인연맹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텐브록은 맹 특유의 문제들을 최소화하지도 않았고, 추측건대 맹이 가진 특별한 힘을 낭만적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는 무기력함에 맞서고 결단력과 끈기를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맹은 “오감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려서 잔존한 네 가지 감각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제2대 전국맹인연맹 회장이 된 케네스 저니건은 “맹 - 핸디캡인가 특성인가”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맹은 하나의 특성일 뿐 ...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텐브록의 말을 되풀이했다. 텐브록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지만, 저니건의 주장은 일종의 개념 도약(conceptual leap)이다. 전국맹인연맹의 간부 래미 래비는 이렇게 말한다. 저니건이 한 말의 뜻은, 맹인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고 사회적 태도가 적절하게 교정되면 맹은 하나의 특성일 뿐 장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1970, 80년대 불거진 뉴욕시 지하철 출입문 문제가 저니건의 접근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준다.

뉴욕시 지하철 출입문: 맹인사회 내부 논쟁

 1983년 미국맹인협의회가 R-44와 R-46 전동차량이 보호막을 장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뉴욕지하철공사를 고소했을 때, 전국맹인연맹은 여기에 반대했다. 맹인 승객들은 지하철을 이용할 때 출입문을 찾을 때까지 지팡이로 차량 외벽을 두드린다. 그런데 만일 지팡이로 두드리는 곳에 보호막이 없을 경우에 차량들 사이에 있는 빈 공간을 출입문으로 오인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철로로 추락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전국맹인연맹이 미국맹인협의회의 소송에 반대한 것은, 맹은 하나의 특성일 뿐이기에 적절한 훈련을 받은 농인이라면 특별한 편의시설이 없어도 된다는 가정에 기초했다. 협의회와 연맹 두 단체는 공공연하게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협의회는 내부 갈등 문제로 1961년에 연맹을 탈퇴한 맹인들이 설립한 단체이다.) 지하철 이용 경험이 많은 몇몇 맹인들이 전동 차량 사이에 보호막이 없어서 사망하거나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경우가 실제로 있었지만, 전국맹인연맹은 자기 입장을 고수했다.
1970년에 어느 맹인 여성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차량과 차량 사이에 난 틈으로 추락하여 철로에 떨어졌다. 결국 그 여성은 열차에 치여 두 다리와 한 팔을 잃었다. 13년 동안이나 지하철을 이용하던 어느 맹인 신문 판매업자도 참극을 당했다. 그 남자는 1974년에 지하철 승강장에서 전동차 출입문이 열려 있는 줄 알고 걸어서 들어갔다가 열차에 깔려 죽었다.미국맹인협의회는 이런 참극을 방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1974년 7월에 거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 미국맹인협의회는 맹인들과 약시인 들을 위한 서비스 제공기관과 당사자 단체들로 구성된 지하철 안전을 걱정하는 시민모임을 결성하였다. 이 모임은 뉴욕지하철공사가 사람들이 철로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2년 12월 27일,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회원 버트 짐머먼이 지하철 철로에 추락하여 사망하자, 미국맹인협의회 도로시 머테이노 회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버트는 오랫동안 지하철을 이용한 경험이 많고 이용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승객이었다. 이처럼 맹인들에게 살인적인 함정이 전체 지하철 시스템의 20%를 차지한다.” 1983년 1월 26일, 협의회는 시민들이 뉴욕지하철공사의 범죄적인 무관심에 관심을 가지도록 위해 공사 앞에서 두 번째 시위를 벌였다.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 단체들이 그 시위를 지지했고, 200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직접 시위에 참여했다.
미국맹인협의회 측에 무료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설 법률회사인 르뵈프-램-그린-맥래가 보호막 설치를 요구하면서 뉴욕지하철공사와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전국맹인연맹의 간부 래비는 TV 뉴스에 출연하여 맹인들은 지하철을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한 보호막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래비는 지하철 보호막이 - 사실상 모든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 단지 맹인 승객들만을 위한 서비스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맹인은 특별한 조치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맹인의 사회 참여에 역효과를 미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전국 규모의 핵심적인 두 맹인 당사자 단체의 갈등 때문에 정책입안자들은 혼란스러웠다. 미국맹인협의회는 1973년에 개정된 재활 법 504조를 근거로 뉴욕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1985년 뉴욕 주 지방법원은 지하철에 보호막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맹인을 차별하는 것이라며 협의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국맹인연맹: 재활 법 504조와 501조의 선구자

 전국맹인연맹의 케네스 저니건 회장은 연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체가 1973년 재활 법 504와 501조를 지지하기 위한 독보적인 로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건 아니다. 1973년 1월10일 전국맹인연맹 워싱턴 지부장 존 니이글은 상원 노동자 및 공공복지위원회 산하 장애인소위원회에서 증언을 했다. 그는 504조가 잠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명백히 밝혔을 뿐만 아니라 맹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전국맹인연맹의 전통적 입장을 뛰어 넘어 모든 장애인들과 연대해야 한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이 조항〔504조〕은 ... 모든 장애인들에게 중요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 이 조항은 한 사람이 맹인이나 농인이라고 해서 또는 다리가 없다고 해서 그가 열등한 시민이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그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그의 시민권이 취소되거나 축소되지 않는다는 점을 공식 인정하는 것이다. ... 504조는 그가 완전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동등하게 기능하는 것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는 불필요한 장벽, 쓸데없는 장애물들, 그리고 불공정한 바리케이드들을 제거하기 위해 법률에 의지할 수 있는 법률적 기초를 제공한다.”


 전국장애인연맹의 핵심인 래비는 국무부 외무과에서 일하는 최초의 맹인 외교관이 되려고 했다. 외교관 자격시험에 연달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지만, 래비는 “시각적 예리함이 매우 부족”하다는 이유로 1987년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소아마비 인이자 장애 전문 변호사인 팀 쿡은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한 래비를 보았다. TV에서 래비는 자기 같은 맹인이 외교관으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국무부 외무과장 조지 베스트와 설전을 벌였다. 이 모습을 본 쿡은 래비에게 재활법 501조에 근거하여 소송을 제기하라고 제안했다. 미네소타 주의원 제리 시코스키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 의회 청문회를 열었다. 200여명의 전국맹인연맹 회원들이 꽉 들어차 청문회장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여기서 래비는 자신과 국무부의 의견 차이를 상기시키면서, “왁자지껄한 청문회장에 들어 온 사람은 누구나 외무과의 장애 차별이 곧 없어질 것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네이글과 래비의 접근법은 맹과 관련된 쟁점만 고집하던 전국맹인연맹의 전통적인 접근법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장애시민단체였던 연맹은 1940년대부터 나타난 근대 장애권운동의 두 가지 특성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었다. 그 특성이란, 첫째 연맹의 투쟁 초점은 맹인의 평등성이고, 둘째 평등성은 맹인들이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할 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세 번째 특성인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 단체들끼리의 연대는 저니건이 회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연맹의 정신과 무관했다. 저니건은 다른 장애 유형 단체들과 연대할 경우 맹인들이 정치적 힘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지만, 미국맹인협의회는 연대를 굳건하게 지지했다.

문화로서의 농

 전국맹인연맹이 맹을 “특성”으로 정의하듯이 많은 농인들, 특히 언어 습득 전 농인들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언어적 소수자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해 스스로를 (대문자 “D”를 사용하여) Deaf people이라 부른다. 운동 진영을 통합하려고 애쓰는 활동가들이 보기에, 맹인이나 농인 같은 하위집단들(subgroups)의 활동은 장애라는 낙인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장애가 아닌 문화로서의 농(Deafness)이라는 시각은 저명한 언어학자인 캐럴 페이든과 탐 험프리스가 쓴《미국의 농인》과 신경과 의사 올리브 색스의《보이는 목소리》에서 비롯되었다.

 농인 당사자이자 호프스트라대학교 특수교육·재활학과 교수인 프랭크 보우는 농인들의 모순적 처지를 지적하면서 “농 문화 지지자들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무상교육, 사회서비스, 차별금지 조항들을 담고 있는 장애인교육법(IDEA), 재활법 504조, ADA의 혜택을 받는 한편, 위 조항의 혜택을 받는 다른 장애인들로부터는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

미국수화

 농인들의 문화는 자신들의 언어, 즉 미국수화(ASL)에서 비롯된다. 올리브 색스는 1960년 윌리엄 스토키가 쓴 “‘미국 농인의 시각적 의사소통 체계’를 최초로 진지하고 과학적으로 주목한 ‘충격적인’ 논문 <수화의 구조>”가 농 문화 운동을 촉발했다고 주장한다. 1972년에 농인 교육단체 데프프라이드(Deaf Pride)를 설립한 바버러 캐너펠은 스토키의 연구 덕분에 특별한 언어적 정체성이 배양되었다고 생각한다. 색스는 캐너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뒷받침했다. “농의 문화적 측면에 대한 발견과 재발견”뿐만 아니라 “농인 정체성과 농인 자부심을 향한 ...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스토키의 사전〔1965년〕과 언어학자들의 수화 공인 덕분이었다.”
스스로를 농 문화와 동일시하는 농인들은 자신들을 장애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창조되고 대대로 능동적으로 물려받은 전통적인 언어의 의미 안에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생각한다. 보우는 농인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호텔에서 두 종류 회의가 열리고 있다고 하자. 한 곳에서는 신체적·정신적 장애인들의 회의가, 다른 한 곳에서는 외국어로 진행되는 회의가 열리고 있다. 농인이 그 회의에 참석한다면 어느 쪽이 더 편할까? 농 문화운동 지도자들은 후자라고 대답한다. 그런 회의에 참석자들은 통역을 통해 외국어를 알아듣는데, 농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참석자들은 말하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읽고 쓰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데, 농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신체적·정신적 장애인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데 별 문제가 없으니까 통역이 필요 없다.


 청인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많은 농인 부부들이 태어난 자식도 농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환성을 지를 정도로 이들의 문화적 연대감은 강렬하다. 태아에게 부모의 농 소질이 유전되었을 경우 낙태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태아에게 농이 유전되지 않았을 경우 낙태할 것이라고 말하는 농인 부부들도 있다. 청인 세계와 소통할 수 없어서 격리되고 배제된 경험 때문에, 이들은 후손에게 물려줄 자신들만의 유산과 공동체를 창조했다. 전국농인협회 회장 로슬린 로젠은 농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자신도 농인 자식을 둔 어머니다. 그녀는 자신의 농이 치유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며, “지금 이대로가 행복하다. 아탈리아계 미국인이 신교도 백인으로 살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로젠과 달리 미국 농인 어린이의 90% 이상은 청인 부부한테서 태어나는데, 이 통계는 농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비판자들은 14세 이상 미국인 약7백만 명이 일상 대화가 어려울 정도의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고, 이 가운데 약150만 명만이 수화를 사용하는데도 농 문화가 너무 강조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농 문화에 소수집단 지위를 부여할 경우 잠재적안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다. 가령, 농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아기는 부모의 수화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이 아기를 농인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농인 어린이는 친부모와 떨어져서 농 문화를 가진 가족 손에 양육되어야 하는가? 농 문화 지지자들도 이런 질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지는 않다.

갤로뎃 투쟁

 농인 운동은 1988년 3월6일부터 3월13일까지 계속된 갤로뎃 대학 학생시위 때 절정이었다. 시위의 발단은 농인의 고등교육에 기여한다던 갤로뎃 대학교가 1864년 개교 이래 단 한 차례도 농인 총장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리브 색스가 쓴《보이는 목소리》를 보면, “모든 흑인 대학의 총장은 흑인이다. 흑인들이 스스로 다스린다는 증거이다. 또 모든 여자 대학의 총장은 여성이다. 여성들이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있다는 증거이다. 농인 총장을 뽑아 갤로뎃 대학교를 농인들이 스스로 다스린다는 증거를 보여주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갤로뎃 시위는 1988년 최초의 농인 총장 킹 조던이 임명되던 순간이 절정이었지만, 1990년 ADA 서명식 무대가 설치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절정에 다다랐다.
색스는 갤로뎃 시위의 기여요인들을 이렇게 언급한다. “빈민, 장애인, 소수집단에 대한 특별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1960년대의 분위기 - 시민권운동, 정치운동, 다양한 ‘자부심’운동과 ‘해방’운동.” 하지만 그는 이 투쟁이 전체 장애인의 지속적인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애권 운동가들은 갤로뎃 투쟁은 전체 장애인 투쟁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자 과거 장애운동을 계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1977년에도 갤로뎃 투쟁에 비견할만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장애권 활동가들은 1973년 재활 법 제504조의 시행을 요구하면서 보건교육복지부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을 25일 동안 점거했었다.
1977년 투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농인들도 있었는데, 농인 교수 프랭크 보우가 대표적이다. 조지프 샤피로는 자신의 저서《동정은 싫다》에서 1977년 점거 농성은 “미국인들이 어렴풋하게 기억”하지만 갤로뎃 시위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장애권 운동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샌프란시스코 점거 농성은 여러 유형의 장애인들이 연대하여 일반사회뿐만 아니라 장애 인구 전체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정치투쟁이었다.

농 교육

 미국 농 교육제도가 구화주의에서 수화주의로 서서히 바뀌면서 수화가 새롭게 각광박기 시작했다. 농 교사 마르샤 베른스타인의 경험을 들어 보면, 현대 농 교육은 진화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베른스타인은 맨해튼에 있는 렉싱턴 농학교에서 1965~66년까지, 그리고 브롱크스에 있는 세인트조지프 농학교에서 1867~69년까지 농인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수화는 농인 어린이에게 “추하고 야만적이고 나쁘다”라고 생각하도록 “세뇌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농 교육법은 구화주의였다.
베른스타인은 1969년 세인트조지프 농학교를 떠났다가 1978년에 복귀했는데, 그 때 농 교육법이 수화와 구화를 동시에 사용하는 “토털 커뮤니케이션”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화 영어(Signed English)는 수화 어휘에다가 구화 영어(spoken English)의 어순과 문법을 결합시킨 영어이다. 이론상으로 보면, 이 방법을 채택할 경우 농인 어린이들이 수화와 영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베른스타인의 생각은 다르다. “이 방법은 효과가 없었다. 영어와 수화의 문법과 구조가 완전히 다르고, 영어와 달리 수화의 90%는 바디 랭귀지와 얼굴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장애인 교육단체 액세스 리소시즈(Access Resources) 사무총장 쥬디스 코헨은 수화와 영어를 이렇게 비교한다. “영어가 1차원적이라면 수화는 시각적이고 3차원적이다. 수화가 어느 정도까지는 상징(icon)을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지만, 영어도 추상적인 언어이기는 마찬가지다.”
베른스타인은 농인 부모한테서 태어난 농인 어린이들은 청인 부모한테서 태어난 농인 어린이들보다 문법과 언어의 개념들을 더 잘 이해한다는 사실이 1980년대 초반에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까닭은, “농인 부모한테서 태어난 농인 어린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수화를 완벽하게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된 반면, 청인 부모한테서 태어난 농인 어린이들은 가장 초보적인 몸짓들만 배웠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 결과, 미국수화는 농교육에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베른스타인은 농인 어린이들이 일단 수화의 문법, 구문론, 어휘를 모국어로 구체적이고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면, 그 다음에는 영어를 제2언어로 받아들일 능력을 갖춘다고 생각한다. 구화 영어의 순차적인 어순을 그대로 사용하는 수화 영어와 달리, 미국수화(ASL)는 체계적이고 표의문자적인 동작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베른스타인은 미국수화를 직접 사용해보니 더 효과적으로 “토털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상적으로 볼 때 농인을 가르치는 교사는 미국수화에 통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정부의 지원을 받는 몇몇 학교들의 본을 따서, 1998년 3월에 뉴욕시의 어느 공립 농 학교는 모든 교사들이 기본적으로 미국수화로 수업을 하도록 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추진했다. 이렇게 2개 국어 정책을 꾸준하게 추진한 결과, 점점 더 많은 전문대학과 대학교들 - 가령 브라운대학교, 조지타운대학교, 예일 대학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 이 미국수화를 외국어 자격요건에 포함시켰다. 당시 <뉴욕 타임즈>에 난 기사다.

농 교육자들과 지원활동가들은 농인 학생들이 장애 학생이 아니라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학생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농인 학생들이 2차 언어, 즉 영어를 배우기 전에 1차 언어인 미국수화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 1867년 당시 농 학교가 26곳 있었는데 모든 학교에서 미국수화를 사용했다. 그런데 1907년에는 농 학교가 139곳 있었는데 모든 학교에서 수화 사용이 금지되었다. 농인을 청인에 더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이번에 뉴욕 주가 미국수화를 다시 채택한 것은 시계추를 한참 뒤로 돌린 조치이다.



농 근본주의자들(deaf purists)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구화나 입술을 읽는 능력을 갖추면 농인도 청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이점이 생긴다. <시카고 선타임즈> 편집자이자 칼럼리스트인 헨리 키저는 언어 습득 후에 완전 농인이 된 사람이서 구화를 완벽하게 구사하는데, 그는 수화 사용자와 구화 사용자 양쪽의 이데올로기를 비난한다. 개별 농 학습자의 특별한 요구에 맞춘 교수법을 옹호할 경우 미국수화라는 “신정통주의”가 구화주의라는 “구정통주의”를 단순 대체하는 것이라고 키저는 우려한다.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청력 재활서비스 단체인 난청인 연맹(League for the Hard of Hearing) 사무총장 케이스 뮬러 역시 키저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모든 농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사회 개혁가 헬렌 켈러

 교육 장벽이 제거되고 교수법이 발전하면서, 농-맹 중복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조차도 점차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애건 투쟁의 선구자인 켈러는 매력적인 개성과 수려한 외모를 활용하여 농인과 맹인들을 위해 국제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한 타고난 일꾼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녀는 유복한 가정 형편과 앤 설리번의 혁신적인 교육 전략 덕을 톡톡히 본 여성이다.
켈러의 자서전《나의 삶 The Story of My Life》을 읽어보면, 켈러가 처음에는 “물”과 같은 구체적인 단어를, 나중에는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깨달으면서 언어 경험을 익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켈러의 경험을 통해, 첨단 보조기구와 함께 “촉진적 의사소통 전달자(facilitated communicator)”와 비슷한 중재자(intermediary)만 있다면 농-맹 어린이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헬렌 켈러는 “장애에 관한 진실을 설파한 사회개혁가이자 활동가”로 기억되지만, 사실 이런 평가는 신비화된 측면이 있다. 장애에 관한 진실은, 켈러도 지적했듯이, 맹인 학습자의 읽기와 쓰기 문제 또는 농인 학습자의 언어 장벽보다 사실은 “가난, 억압, 선택의 제약”과 더 많이 관련되어 있다.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