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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태의 아름다운 만남 06. 아름다운 만남 사랑의 향기를 담아 - 양원태(출판기획 올벼 대표)의 글입니다.
이정자씨(60세)는 지금도 나눔봉사단이란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열린우리당 마포구 나눔운동본부장이란 감투도 하나 갖게 되었지만 그녀에겐 감투 따윈 그다지 중요치 않아 보인다. 어쨌든 그녀의 다리는 사람들을 향하고 그녀의 귀는 열려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즘 화투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하기에 거슬리는 바가 없다는 이순(耳順)의 나이에, 새삼 화투를 배우는 것은 무료한 일상의 소일거리가 아니다. 혹여 저녁 찬거리라도 마련할 수 있으려나 하는 소소한 욕심에서는 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순해진 귀’로 온전히 듣기 위해서다. 때로는 자분자분 늘어놓는 일상사를, 때로는 물기 어린 어조로 돌아보며 곱씹는 삶의 궤적들을, 혹은 이기심에 일그러진 세인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를, 온전히 듣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하자, 그녀는 난감해한다.
  “내가 무슨 한 일이 있어서, 남에게 이야기할 게 있겠수. 이런 자리도 쑥스러운데……. 그냥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요.”
  하지만 몸에 밴 겸손 뒤 안에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음을 느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져오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와 잔잔한 시내처럼 흘러온 삶의 향기가…….

  그녀가 귀 기울이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다양하다.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노모의 가슴 속 애끓는 소리, 치매 남편을 부양하는 아낙의 나지막한 한숨, 불편한 몸으로 말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장애인의 어눌한 호소, 심지어 아동보호시설에 남겨진 갓난아기의 새록새록 숨쉬는 소리까지 그녀는 귀를 통해 마음으로 듣는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이른 아침 일어나 장을 보고, 몇 가지 찬을 준비하고 밥을 해서 바리바리 싸들고 길을 나서면, 도착하자마자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면서도 그녀는 항상 귀를 열어놓고 있다. 지칠 법도 하건만 벌써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화투는 사람들의 입을 열고 마음을 열기 위해 그녀가 새로 시작한 훌륭한 대화의 통로다.

이런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흔히 ‘봉사활동’에 열심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말이 달갑지 않다.
  “봉사는 무슨……. 가진 것이 없어서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하는 걸. 오히려 나를 위한 일일 뿐이지요. 그들을 만나면서 얼마나 큰 마음의 위안을 얻는지 모릅니다.”
  ‘봉사활동’이란 말은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온다. 꼭 살가운 느낌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살 만한 사모님들의 월례모임에서 받는 거리감, 이런 저런 추문에 휩싸인 연예인들의 후일담을 ‘반성’이란 표현으로 장식한 신문기사를 보는 우울함, 심지어는 내신 성적을 위해 방학마다 출석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학생들을 보는 안타까움과 씁쓸함까지.
  그래서일까? 그녀는 대신 ‘나눔’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나눔’의 의미는 ‘내가 가진 것들 중 일부를 나누어 준다’는 빼기의 개념이 아니라, 마주 앉아 밥 먹고 화투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듯 ‘함께 한다’는 더하기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말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남에게 나누어 줄 만큼 가진 것이 별로 없다. 그녀 자신의 말마따나 ‘열 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 한 채, 함께 사는 장성한 아들 셋이 지금 가진 것의 전부’다. 하지만 그나마의 현재가 그녀에게는 다행스럽고 소중하다. 열여섯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이후, 숱하게 헤쳐 온 삶의 풍파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남만큼 배우지도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직장생활의 어려움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한때는 남편과 함께 튼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직장생활의 경험을 기초로 직접 의류 수출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많을 때는 18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일했다고 하니, 꽤나 규모 있는 회사였음이 분명하다. 이 시절엔, 때론 하루하루의 삶에 겨워서, 때론 밀려드는 일이 바빠서 ‘나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래하던 대기업의 부도 여파로 하루아침에 회사의 문을 닫아야 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망하는 법이 없는’ 자본가의 재주를 그녀는 미처 배우지 못했다. 가진 것 다 내주고 가까스로 작은 임대아파트나마 들어가게 되었지만, 백여만 원의 보증금조차 채울 길이 없었다. 겨우 친지에게 20만원을 빌려 입주하던 날 저녁,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을 함께 하던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던 날엔 검은 하늘마저 무너져 내렸다.

  끼니 걱정에 허덕이며 삶에 대한 울분과 회한으로 안으로 안으로만 잦아들던 그녀가 다시 세상에 귀를 열고 마음을 열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어느 날, 성산동 집에서 멀지 않은 상암동의 한 아동보호시설에 들르게 된 것이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가쁜 숨 몰아쉬며 살아남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밭은 울음소리를 그녀는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었다. 지치고 한스러운 자신의 일상이 사치스런 투정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과 다시 만났다.

  그날 이후, 무작정 복지관들을 찾아다니며 할 일을 물었다. 그런데 소개받은 사람들의 집에선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이미 일주일에 한두 번씩 다른 봉사자들이 다녀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닐 생각은 하지 않는 복지관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 사람들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 그 닫힌 문들을 열어나갔다.
  그런 날들이 하루하루 쌓이다보니, 이제 그녀는 스스로 사람들을 찾아다닐 여유가 없다. 그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그녀만 만나면 하나같이 “내가 며칠 전에 만난 사람이 말이에요…….”하며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늘어놓는다. “좀 도와주실 수 있겠느냐”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발길이 움직인다.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에, 한숨에, 마음의 잔잔한 미동에조차 귀 기울이는 생활은 이제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말을 아끼는 그녀지만,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묻자 가슴에 남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아들 둘을 먼저 보내고, 장애인 아들과 치매 남편을 돌보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눈물 흘린 사연, 자신을 엄마처럼, 할머니처럼 따르던 여성장애인 생활공동체에서 마주한 딸 같은 장애여성의 순박한 눈빛……. 이 모두가 그녀에겐 현재 진행형이다.
  “뇌출혈로 전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생활을 하는 아들을 돌보는 팔순 노모가 있어요. 폐지를 모으는 취로사업으로 한달에 겨우 30만원 남짓 벌이를 하는데, 그나마 열세 평짜리 연립 한 채를 갖고 있다고 생활보호 혜택도 못 받는다지 뭐요. 도대체 이런 사람들 하나 돌보지 못한다면, 나라에선 무슨 일을 하는 거란 말이죠?”
  줄곧 차분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다소 상기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젊은 사람들도 쉽지 않을 일들에 어려움은 없는지 하는 우문을 던졌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아직 팔다리 성한데 어려울 게 뭐 있겠소.” 하고 말 하지만 어찌 말과 같을까.
  “막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였어요. 집에 돌아오니 막내가 통닭이 먹고 싶다는 거 아니겠소. 마침 그날 노인정을 다녀오느라 반찬 준비에 2만원이나 쓴 터라 사줄 수가 없었지. 다음날, 미안한 마음에 아들에게 통닭을 사먹자고 했더니, 아들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사실,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데요, 뭐’하는 거야. 어찌나 아프고 고맙던지…….”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한다. 차비가 없어서 아들의 하교 길엔 걸어서 집에 오도록 했던 시절이다. 집안이 기울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한참 예민한 나이에 상처받았을 아들인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일을 이해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가족들은 그녀에게도 고향이고 휴식이었다.

  오늘도 그녀는 밥이며 찬거리를 들고 또 누군가의 집을 향해 가고 있으리라.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줄, 아직은 어두워지지 않은 귀를 갖고 있음을 감사하며. 하지만 이제 그녀도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좀더 나이가 들어 지금처럼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어려워지면 어쩌나 걱정이다. 그래서, 움직이기 힘들어 지더라도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작은 컨테이너라도 한 칸 마련하고 싶은 게 지금 그녀의 희망이다.

  한 정치인이 자신은 ‘가치를 위한 정치를 하지, 누군가를 위한 정치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와 별반 다르지 않게, 가난 구제는 나라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체제와 정치제도의 변화, 정치권력의 변혁을 통해 더불어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그러나 사람의 문제는 사람이 푼다. 체제나 제도 너머 빈 공간은 언제나 있다. 요란한 거대담론의 뒤안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을지 모르는 ‘마음’의 문제는 새로운 화두로 다가온다. 그리고 한 초로의 어머니와의 만남에서 나는 작은 해답의 실마리를 보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너무나 평범하다.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눈길 한번 건네는 일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인상이고 삶이다. 오히려 그래서 이 만남은 더욱 뜻 깊다. 분주한 일상의 하루하루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 가운데, 그녀와 같은 마음 따뜻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 때문이다. 이제 내 일상에 기쁨이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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