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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헬런 켈러가 될 수 있는 사회를 제안함 - 고병수
04. 프리즘 누구나 헬런 켈러가 될 수 있는 사회를 제안함 - 고병수(연세의원 원장, 한국장애인인권포럼 감사)의 글입니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고 방송이나 책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는 개인적인 노력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노력도 많았고...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할 때, 가까운 주변의 지극정성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노력 하나만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어렸을 때 우리 학급에는 꼭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친구들이 한 명씩 있었다. 어느 반을 가도, 진학을 해도 그랬다. 한 학년에 60명이 조금 넘게 있었으니까 60명 중 한 명 꼴이랄까.
  하지만 그 때는 그 친구들이 몸이 불편해도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나 못 살았고, 몸 하나 불편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 하면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어떤 재주가 있어서 발표를 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축구를 할 때도 그 친구들이 열외로 따돌림 당하지도 않았다. 두 손에 목발을 짚고 뛰긴 했어도 열심히 구성원으로 끼어서 같이 어울려 축구도 했다. 두 다리 대신 목발이 공을 차는 발 역할을 했다. 오히려 그 목발에 맞을까봐 가까이 가지 못해서 그 친구들이 더 유리한 면도 많았다. 물론 더 어려운 장애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 자신도 그들을 차별한다는 생각은 가져보질 못했다. 오래 전일수록 공동체 의식이 있었고, 다 같은 운명체 의식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경쟁관계가 심화되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부지런히 앞으로 뛸 수 있는 사람만이 대접받고, 낙오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예 출발선에 서 있지도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는 모든 것을 빨리, 앞서 나가야 한다는 핑계로 비장애인을 우선으로 뽑고, 장애인은 차별하게 된다. 사기업뿐만 아니라 공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뿐인가? 일상 모임이나 활동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나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정말 힘들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앞서 나가는 나라들에 비해서, 우리와 비슷하거나 다소 낮다는 나라들에 비해서 훨씬 뒤떨어지는 장애인 정책이나 인식도는 어디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까?

  오늘 나는 몇 가지 우리 주변의 인식상태를 점검해 보면서 그 해법을 찾아보고자 이 글을 써 본다. 해법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조직, 어느 곳에 있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본 사고방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두서없이 정리해 볼 것이다.

  앉은뱅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 김창숙 선생, 귀머거리에 보지 못하는 헬렌 켈러,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한 자폐증 환자 배형진.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훌륭한 업적을 남기거나 유명하다는 점, 장애를 극복했다고 평가된다는 점. 대게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고, 누구에게나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더 중요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을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근본적인 내용이 사실은 은폐되고 있었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이 생길 것인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유림으로 살다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헬 켈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러 선생을 가정교사로 두었다. 배형진, 그는 지극한 어머니의 정성으로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외에도 수많은 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고 방송이나 책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는 개인적인 노력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노력도 많았고.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할 때, 가까운 주변의 지극정성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노력 하나만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쩌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릇된 이데올로기....,
  일종의 우월의식, 지배자의 논리, 생존의 법칙 등으로 표현되는 이데올로기에 우리는 귀먹고, 눈멀고, 그러다 보니 생각도 없게 되는, 그저 들리는 데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그런 처지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회의 보편화된 인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도운 것도 아니고, 부모나 가까운 지인들이 도와서 그 장애인이 성공했다고 해 보자. 그랬을 때 사회 전반의 관심과 도움이 있다면 더 많은 장애인들이 성공할 수 있었을 테고, 더 많은 장애인들이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오히려 성공한 장애인들이 너무 많아서 유명세를 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능력이 있으니까 성공했겠지.”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바라봤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성공한 장애인을 보면서 박수를 쳐 주지만, 같은 처지의 다른 이들을 보면서 똑같이 못하냐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가? 왜 언론은 잘 나가는 장애인은 집중 보도하면서 보통의 장애인들의 문제는 사회이슈로 떠오를 때만 보도를 하는가?

  여성이든, 어린아이든, 어르신이든, 장애라는 짐을 진 사람들이든 모두 평등하고, 똑같이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 한다. 여성의 권리가 제대로 찾아지지 않으니까 정당에서도 일정 비율로 여성 할당 몫을 책정을 한다. 여기저기서 장애인 몫도 눈꼽만큼 만들었다. 물론 이런 할당은 이전보다 나아진 면에서 찬사를 보내지만 어디까지나 눈 가리고 아웅 격이며, 낮은 의식수준에서 생겨난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내용이 못 된다.

  나라 전체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정책적 고민, 학교나 기업에서의 배려, 비장애인들의 의식의 발전, 이 모든 것들이 박자를 맞추면서 사회가 나아가야 한다.
  장애인 주차장, 점자 도로,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 장애인 의무 고용률(상시 노동자 300명 이상의 대형 사업장이 장애인 의무고용비율 2%) 준수, 장애학생 학습권(교과서 점자화 문제, 모든 강의에 지체장애 학생 접근권 확보, 학내 점자 유도 블럭과 음성신호기 설치 등), 일부가 불편할 뿐이지 우리와 똑같다는 일반의 인식, 그리고 우리도 예비 장애인이라는 절박감.... 우리가 함께 갖춰야 할 것은 주변을 돌아보면 너무도 많아서, 지금 우리는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 사회가 발전한 사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척도는 국민소득이 얼마인지가 아니다. 오히려 다소 천천히 가더라도 빈부의 격차가 작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 어린이, 어르신, 그리고 장애인들의 권리가 존중되는 성숙한 사회가 조성되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리 장애인들은 말한다. “특별히 뭘 더 해준다는 생각 말고, 우리도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달라.”고. 그랬을 때 심산보다 더 훌륭한 선각자가 나올 것이고, 헬렌 켈러보다 더 훌륭한 여인이 나올 것이고, 제 2, 제 3의 배형진이 사회 도처에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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